전주 출신으로 인쇄출판사업에 뛰어들어 큰 성공을 거둔 유기정 전 국회의원이 6·25전쟁 때 전주에서 한지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번 일화가 있다. 상경해서 취직한 평화당인쇄(훗날 삼화인쇄)는 광복 후에도 번창했지만 6·25 때 문을 닫았다. 1·4후퇴 때 고향에 온 인쇄업자 유기정의 눈에 ‘전주한지’가 들어왔다. 서학동에 ‘전주한지공업사’를 차린 그는 법원이 피란지 부산에서 벌인 토지·건물 등기부 복구사업에 참여, 전주한지를 독점 공급했다. 그의 한지공장에서는 150명이 한지를 생산해 납품했고, 유기정은 이 한지 사업을 통해 1000만환이 넘는 큰 돈을 벌었다.
전주시 팔복동의 제지공장 전주페이퍼(옛 전주제지)는 전라북도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야심차게 추진한 전주산업단지의 첫 작품이었다. 나중에 삼성 이병철 회장 쪽에 넘어갔지만, 처음 전주페이퍼 공장 건설에 나선 인물은 무주 출신의 출판업자 김광수 전 국회의원이었다. 당시 김광수 사장은 대한교과서(주)의 용지 확보를 위해 제지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고향 유지들의 팔복동 입주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대한교과서는 지금도 미래엔그룹 이름으로 출판·교육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 전주는 ‘완판본’의 고장이다. 전라감영은 유교와 건강 등 통치에 필요한 책을 주로 간행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는 백성들의 다양한 취향과 요구에 부응하는 출판이 번성했다. 전라감영의 출판 문화가 민간으로 확산되는 기반이 마련된 탓이다. 춘향전, 유충렬전 등 다양한 소설류가 이 때 전주에서 판각, 출간됐는데, 이를 완판방각본이라고 부른다. 전주에서 생산된 방각본이 6·25 등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전라감영의 완판본 5059개가 전주향교에 보관(현재는 전북대박물관)돼 온 것은 다행이다. 대대로 책의 소중함을 뼛속에 간직해 온 전주 선비들, 지역사회에 탄탄히 자리잡은 인문학 정신 덕분이다. 전주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힘이다.
‘2017 대한민국 독서대전’이 ‘사랑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을 주제로 1일부터 사흘 동안 전주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전주한지의 고장, 완판본의 고장, 출판문화의 고장 전주가 독서대전을 계기로 한층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