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여성 시인들의 섬세한 감성 따라…

한선자·하기정·조미애, 잇따라 시집 발간 / 비정규직 문제·자기성찰 등 다양한 시선

▲ 한선자, 하기정, 조미애 시인과 시집.(왼쪽부터)

전북 문단의 여성 시인으로서 굵직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선자, 조미애, 하기정 시인이 잇따라 신간을 냈다. 저마다 작품 세계는 확연히 다르지만 남성 중심이었던 문단에서 여성 문인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다.

 

△한선자 <불발된 연애들> 수많은 당신을 끊임없이 버리는 일. 한선자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다. 시산맥 출판사의 기획시선 공모 당선 시집이기도 한 그의 신작 <불발된 연애들> 은 세상에 대한 공감이다.

 

‘십 년 하고 또 십팔 년 더 일했다고/ 회사에서 돛단배 세 척을 받았다// 444, 444, 444/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들/ 죽어도죽어도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는 나를/ 죽어라죽어라죽어라 내모는 것 같다’( ‘파도타기’중)

 

돛단배는 동력 없이 스스로 배를 움직여야 한다. 28년을 다닌 회사는 나에게 ‘못 하겠다는 나를 내모는’ 돛단배를 준다. 하지만 움직여서 가야만 한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날선 바람을 견디면서 파도의 주먹을 삼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몸속에 피아노 몇 대쯤 거뜬히 키울 수 있어야 한다’는 시인은 팍팍한 삶에서도 낭만을 잊지 않는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실존적인 결단과 의지를 보여주다가도 때론 분노와 연민을 드러낸다.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그를/ 사람들은 비정규라 부른다/ 기계 부품을 만드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풀어지지만/ 살뜰한 가족이 그를 다시 조여 준다’( ‘어이, 비정규’중)

 

비정규직인 그가 전원을 꺼도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어이, 비정규” 그를 부르는 환청이 족쇄처럼 따라다닌다. 시인은 부조리하고 각박한 현실에 대한 냉소를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현실에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하기정 <밤의 귀 낮의 입술> 글쓰기, 강연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해왔지만 시집을 낸 것은 처음이다. 하기정의 <밤의 귀 낮의 입술> (모악)은 신선하고 특별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흥미를 끌어낸다. 문태준 시인은 “하기정 시인의 시집에는 매력적인 질문들이 가득하다. 뻔하고 상투적인 세계를 뒤집어 낯설고 위험한 세계가 위로 솟아오르게 한다”고 평했다.

 

‘단지, 과일이 먹고 싶은 밤’, ‘다섯 개의 선물상자’, ‘그 여름의 감정’,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밤’ 등 4부로 구성된 책은 다채로운 분위기의 작품을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다.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7년간 견고하게 구축한 그의 작품세계를 빼곡히 담았다.

 

‘잘 자, 라는 말 대신/ 썩 괜찮은 악몽이라도 꾸었어야 했다/ 팔을 뻗으면 닿을 엄두만 내다가/낮의 입술이 밤의 귀를 다 열어서는/ 읽을 때까지’ ( ‘밤의 귀 낮의 입술’ 중)

 

표제작은 묘한 뒤틀림이 담겨 있다. ‘귀’가 업보라면 ‘입’은 족쇄와도 같다. 그는 낯익은 듯 보이는 서정적인 시어들을 낯설게 충돌시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특히 아름다운 수사를 불안한 감정 등과 혼재시켜 시의 매혹을 증폭시킨다. 조동범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이는 ’하 시인이 만든 특별한 미의식의 세계 ‘다.

 

우석대 대학원 문창과를 졸업한 그는 5·18문학상, 제7회 작가의눈 작품상을 받았다.

 

△조미애 <꽃씨를 거두며> 조미애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꽃씨를 거두며> (이룸나무)는 연속적인 선을 이루기 위해 찍는 하나의 마침표다. 자신의 글쓰기는 가벼운 기침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다는 조 시인.

 

‘별채에 남은 나팔꽃은 예쁘게 피었다가 18알의 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피고 또 지고 두세 해가 지나자/ 마침내 그들만으로도 숲을 이루게 되었으니/ 가끔은 먼 길 나들이도 쉬이 나갈 수 있었다’(표제작 ‘꽃씨를 거두며’ 중)

 

조 시인은 느릿하지만 꾸준히 시 꽃을 피워냈다. 어느새 숲을 이룬 시 세계를 보며 ‘제 몸 다시 태어나기 위해 얇은 막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꽃씨를 거두기로 했다.

 

100여 편의 시에는 치열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잠시 그렇게 지나고 나면/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었을 뿐’( ‘바다는 바람에게’)이고, ‘부드러운 흙과 틈새를 넘어오는 바람과 함께 앉아/ 붉은 노을 바라보면서 여유로운 저녁을 기다릴 것이다/ 떠남에 있어 작은 손수건 하나면 충분하리’( ‘떠날 시간을 기다리면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수년간 몰두했던 창작열과 작품들은 이제 새로운 시 세계를 탄생시키기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마치 ‘껍질만 남은 콩이 마른 육신을 땅에 던져 새콩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콩’).

 

조 시인은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전북시인협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