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블레이크가 남긴 한 마디

제도 맹점을 인간적 배려로 메꿔주는'따뜻한 행정'이 촛불이 연 진정한 민주시대

▲ 홍용웅 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

켄 로치(Ken Loach, 영국) 감독은 진솔하고 집요한 연출로 유명하다. 201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약자 편에서 사회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저력과 일관성이 존경스럽다.

 

영화는 심장병을 앓는 노인 다니엘 블레이크가 대적해 싸우는 영국 복지행정의 난맥상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너무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 때문에 더 가슴 미어지고 화가 난다. 결국 우리 주인공은 구제절차가 진행되는 희망찬 날, 심장마비로 돌연사 한다. 승리를 목전에 두고 말이다. 허탈감과 분노의 포로가 된 관객은 그저 망연자실할 뿐.

 

영국 같은 복지 선진국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다니 참 어이없다. 중층의 사회안전망이 형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홀에 빠진 블레이크는 복잡한 이의신청과 불복, 그리고 징벌절차 속에서 길 잃은 양처럼 가없이 헤맨다. 심장이 나쁘니 당분간 쉬라는 의사의 소견과 무슨 일이든 해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제도 사이에서 미궁에 빠진 힘없는 모범시민. 그러나 시스템은 견고하다. 다르게 해석할 일말의 여지가 없다. 제도는 이런 경우를 예비하지 않았고, 규정에 없는 사람은 투명인간일 뿐이다.

 

영화 속 관료체제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더없이 성실하다. 제 일에 여념이 없으며, 남 일엔 추호도 간여치 않는다. 고지된 시간보다 몇 분이라도 늦게 온 민원인에겐 징벌이 있을 뿐, 개인사정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너무 사무적이어서 복지센터는 숨이 막힌다. 책임자는 자동생산 라인의 감시카메라 같다. 경비는 소란행위에 퇴장조치나 경찰고발로 대처한다. 창구는 인간적 유약함을 보이면 안 된다. 그리하면 민원인의 버릇을 버리고 예외가 생기니까. 설상가상으로 고객 부담의 자동응답 전화와 난해한 전산입력 절차는 고령자들을 고문한다. 제도를 탓할 것인가, 개인을 탓할 것인가?

 

이 영화를 단체 관람한 날, 전 직원은 너나없이 숙연해졌다. ‘매일같이 고객감동을 외치는 우리, 실제 업무에 임해서는 규정 제일의 탁상행정으로 일관하는 건 아닌지?’ 불편한 질문들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사업설계 시 기업인들이 느낄 절차의 번잡함을 고려하는가? 어려운 기업을 도와준다면서 기준은 너무 높게 잡아 한낱 그림의 떡에 불과한 지원을 하고 있진 않은가? 기준 미달로 지원 불가 판정을 받은 기업인의 아픔을 함께 앓아본 적이 있는가?

 

지원자 입장에서 기준은 사업의 공정성을 방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입장이 다른 쌍방 간 기대차가 엄존할 밖에 없으며, 불만은 그 폭에 비례한다. 이의 근원적 해소가 최선이나, 방법이 없다면 상호이해와 소통이 차선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이 아니라 자존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주인공이 끝내 진술치 못한 최후의 한 마디이다.

 

무릇 지원행정에서는 팔을 비트는 강제보다는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넛지’가, 당락에 목매는 시혜보다는 폭넓은 참여를 유인할 자유주의적 개입이 바람직하다. 이 시간에도 다수의 블레이크들이, 송파 모녀 사건이 웅변하듯, 경색된 제도와 책임 전가의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제도의 맹점을 인간적 배려로 메꿔주는 따뜻한 행정, 그것이 촛불이 연 진정한 민주시대의 요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