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2년 2월 1일 전라도(全羅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서운관(書雲觀)에서 해괴제(解怪祭)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천재지변을 만나면 마땅히 인사(人事)를 닦으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제사를 행할 것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2월 1일 병진 1번째 기사)
지진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일부이다. 경주 지진에 이어 최근 포항에서 일어난 큰 지진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바다 건너 멀리 일본의 일일 뿐 지진 안전지대인 줄로만 알았던 우리 일상에 닥친 변고로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 속에서 지진의 경고는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역마다 일어난 지진 등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관리와 임금의 다양한 반응과 조치들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임금에게 지진을 이야기한 서운관은 기상을 관측하고 시간을 관장하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일식과 월식 그리고 우주의 별들을 관찰했고 조선시대 초반 태조시기 한양 천도에도 관여를 하였다. 1395년에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석각을 제작하고,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와 하천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수표 등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의 역할을 더해 각종 과학 관련 업무까지 담당하며 장영실을 비롯한 많은 관원을 배출한 곳으로,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이 된 관청이다. 그렇게 천기(天氣)를 살피며 기상을 예측하는 일을 담당하다 보니 천재지변에 관한 일을 주로 임금에게 아뢰다 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을 경우 꾸중을 듣거나 귀양을 가는 일이 많은 관직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많은 지진 기록에는 지진의 횟수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단순히 지진이 발생한 횟수보다도 사람들의 반응과 대처 자세이다. 지진이 나고, “가옥이 흔들리며”(「선조실록」 52권), “담과 가옥이 무너지고 허물어져 사람이 많이 깔려 죽기”(「단종실록」 12권)까지 하는 여러 피해 기록 속에서, 신하들은 자연의 현상을 무언가의 계시로 보아 제사를 청하거나 임금이 직접 나라에 재변(災變)이나 기이한 자연 현상이 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내던 제사인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중 태종은 지진을 정국의 정치적 개편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전에서 회의하다 직접 지진의 진동을 강하게 겪은 태종은 지진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며 즉각 이용했던 왕으로, 지진을 사람 탓으로 치부하여 자신의 왕권 강화에 방해된다고 여긴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제거했다. 처음에는 민 씨 형제의 부덕함을 지적한 사간원의 상소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나 이듬해 다시 큰 지진이 발생하자 이들의 해괴함으로 다시금 큰 지진이 발생했다 탓하며 자결을 명하여 이들을 지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또한, 지진을 정치적으로 보다 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중종 때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조광조의 사림파와 그 반대파인 훈구파의 대립이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음(陰)이 성하는 조짐”이어서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소인(공신)들을 멀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주어 사림파가 정국 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1518년 큰 지진이 다시 일어나자 도리어 반대 세력에게 역공을 당하게 된다. 이는 결국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기묘사화로 이어지고 이후에도 중종은 1518년의 대지진이 ‘기묘사림의 변란(己卯士林之變)’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등 불운한 사건으로 남았다. 또 지진을 예언하여 민중들의 동요를 일으킨 사람들의 죄를 벌해달라는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판단으로야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법한 이유였나 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태평시대에도 어김없이 지진 발생의 기록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한반도에 늘 지진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방심 없이 자연재해에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진의 기록은 지진의 범위가 경상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주, 익산, 고부 등 우리 전라북도 지역에도 고르게 발생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 지역도 결코 안심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라도의 전주(全州)·남원(南原) 등 27개 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15권)
전라도 전주 등 13고을에 지진이 일었다 (「세종실록」 65권)
전라도 전주에 지진(地震)이 일어나니,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세조실록」 9권)
남원부(南原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예종실록」 7권)
전라도 익산군(益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중종실록」 27권)
전라도 임실(任實)에 지진이 일어났다 (「명종실록」 17권)
전라도의 전주(全州)·여산(礪山)·임피(臨陂)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인조실록」 42권)
전주(全州)·김제(金堤) 등의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효종실록」 20권)
전라도(全羅道) 정읍(井邑) 등 세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숙종실록」 29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라도 지역의 지진 기록을 ‘전라도’ 키워드가 포함된 것으로만 한정해도 200여 건에 이르고, 나라에 본격적인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 이래로 따져도 전라북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8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해괴한 일로 여겨 지진을 두려워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누군가의 잘못으로 탓을 돌려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지진을 이용하였다.
그런 악폐가 있었지만, 관은 지진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상황을 파악하여 이를 기록하고 구호 활동을 하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지진과도 같은 큰 자연재해가 두려움에 대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현재의 과학으로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없는 지진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위험을 예측하고 준비하며 다가올 상황을 앞당겨 예행연습처럼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지반이 약한 곳이나 붕괴의 위험이 있는 장소를 미리미리 점검하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헤쳐 나갈 방법을 숙지하고 준비해야 한다.
수많은 역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과거의 기록들이지만, 기록의 힘으로 우리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준다. 역사의 기록으로 알려 준 우리 지역의 지진 진앙지를 분석하여 재난에 대비하여야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 시민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내어주는 것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