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로 단풍나무 붉게 물드는 데 길가 생강나무 한 그루 저 홀로 말간 치자색이다. 햇살 오라기들은 나뭇잎을 한잎 두잎 색칠하여 골짜기를 가지각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하루 이틀에 이토록 화사한 단풍으로 단장하였을까. 고운 빛을 내려고 봄여름 내내 색깔을 입히고 또 덧칠하였으리라.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연두의 고통과 따가운 햇볕을 지나온 초록의 땀방울로, 단풍은 온몸을 오색으로 물들여 농익은 가을 빛깔을 천지 사방에 흩뿌리고 있다.
오솔길을 따라 드문드문 쑥부쟁이 꽃이 연보랏빛으로 하늘거린다. 나무와 칡넝쿨이 엉클어진 모습은 사람이 머물지 않은 원시림 같았다. 나도 숲에 물들어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폭포 소리가 쏴르르 귓가에 파고든다. 계곡으로 내려가 너럭바위에 앉았다. 높은 나무 위 박새 소리와 물소리에 젖어 단풍잎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햇살에 투영된 나뭇잎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아리땁기만 한 단풍잎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픔이 많다. 산속의 수많은 풀벌레에게 받은 상처로 난 구멍일 것이다. 또 다른 목숨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느라 자신은 상처 입고 야위어 간다.
몸집이 자그마한 우리 시어머니도 자식들 거두느라 온몸에 구멍이 생겼다. 자신은 돌보지 못하고 오롯이 자식과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어머니의 굽은 등. 긴 세월 삶에 절여져 몸속에 구멍 나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구멍 뚫린 당신의 육신을 디딤돌로 자손들은 나날이 푸르러가건만.
나뭇잎에 뚫린 구멍도 저 홀로 살지 아니하고 서로 껴안고 견뎌낸 흔적이리라. 숲은 이렇게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단풍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길에 숲에 묻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소沼에 들렀다. 숲속의 연못은 불쑥 찾아와 흙 묻은 발로 짓밟아도 말없이 나를 품어준다. 먼지에 찌들고 땀방울로 얼룩진 손을 씻어도 계곡물은 해맑게 나를 비춘다. 세사에 긁혀 움푹 파인 가슴에 푸릇한 물기가 차올라 마음이 청량해진다. 산속에 들면 계곡 물소리는 귀를 맑게 씻어 주고, 나무를 담은 내 눈은 초록 바다가 된다. 세상의 소리 아득히 멀어지고 숲에 물들어 내 영혼마저 순연해진다. 새 한 마리 산등성이 노을빛을 물고 날아간다.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도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정상에 오른 쾌감보다 내 몸에 스며든 숲속의 향기가 더 좋다. 따라다니던 근육통도 땀에 절은 끈적거림도 없어져 담담하고 여유롭다. 그래서 선인들도 세속이 시끄러울 땐 숲을 찾아 무의구속에서 벗어나 심성을 함양하고 도를 실천하는 참된 삶의 바탕으로 자연과 일체를 추구하였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느새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내가 되며 숲은 한줄기 바람으로 넉넉한 새 울타리가 된다.
△박일천 씨는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토지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을 받았다. 현재 샘문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수필집 <바다에 물든 태양> , <달궁에 빠지다> 가 있다. 달궁에> 바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