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품석이 진궁을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한낮, 대야성의 청에 앉은 김품석의 표정은 밝다. 사방 100자(30m)가 넘는 청에는 수십 명의 관리, 무장들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인근 성에서 온 성주들도 눈에 띄었다. 진궁이 두 손을 청 바닥에 짚고 김품석을 올려다보았다.
“군주(軍主), 부르셨습니까?”
김품석이 전령을 보내 대야성으로 부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면서 청 안이 조용해졌다. 김품석은 28세. 장인인 김춘추와 같은 아찬이며 진골 왕족이다. 42개 성을 거느리는 대야군주(軍主)였으니 김춘추보다 오히려 실세다.
“대아찬, 심현성에는 이미 신임 성주가 가 있으니 그대에게 새 직임을 주겠다.”
김품석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대야성 북쪽의 구마장 관리인이 비었다. 그대가 관리인을 맡으라.”
“마장 관리인입니까?”
“그렇다.”
김품석의 눈빛이 강해졌다. 청 안의 문무관(文武官)들이 숨을 죽였고 누군가 쇠붙이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진궁이 김품석의 시선을 받은 채 심호흡을 두 번 하고나서 입을 열었다.
“막중한 소임을 맡겨주셔서 감사드리오.”
“그런가?”
어깨를 늘어뜨린 김품석의 눈빛이 약해졌다.
“오늘부터 맡으라. 관리인 숙사는 비었을 것이다. 북쪽의 구마장이다.”
“예. 군주.”
머리를 숙여 보인 진궁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청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궁이 청을 나왔을 때 마당 건너편 중문 밖에서 기다리던 장춘이 따라붙었다. 장춘은 삼현성에서부터 따라온 진궁의 집사다. 진궁의 집안에서 대를 이어서 내려온 씨종인 것이다.
“주인, 어떻게 되셨소?”
진궁과 비슷한 연배의 장춘이 옆으로 붙어 걸으면서 물었다. 장춘은 뼈가 굵었고 힘이 장사여서 지금도 말을 어깨에 올리고 걷는다. 진궁이 대답 대신 지나는 군사 하나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
“대야성 구마장이 어디 있느냐?”
“이 길로 주욱 가시오.”
군사가 손으로 앞쪽을 가리키더니 진궁을 훑어보았다.
“거긴 뭐 하러 가십니까?”
“내가 구마장 관리인이 되었다.”
“병든 말 몇 마리뿐인데요.”
그때 장춘이 군사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보게. 병든 말 몇 마리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성의 새마장은 남쪽 마장으로 옮겼고 구마장은 병들고 죽어가는 말 몇마리만 남겨놓았소.”
숨을 들이켠 장춘이 다시 물었다.
“그곳 관리인이 있었는가?”
“관리인이 무슨 필요가 있소? 군사 대여섯 명이 지키고 있을 뿐이오.”
그때 진궁이 장춘에게 말했다.
“자, 가자.”
“고맙네.”
군사에게 인사를 한 장춘이 진궁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둘이 다섯 걸음을 걸었을 때 장춘이 앞쪽을 응시한 채 말했다.
“주인, 잘 되었소.”
진궁은 발만 떼었고 장춘이 말을 이었다.
“마장 관리인으로 박아놓고 감시를 하겠지요. 행여나 했던 내가 미친놈이었소.”
장춘은 전택이 계백을 만나고 온 것도 아는 것이다. 어깨를 부풀린 장춘이 힐끗 뒤를 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둑은 손가락만한 구멍 하나가 커져서 터지는 법이오,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