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96년 초 종로에서 노무현, 이종찬과의 경쟁 끝에 지역구 국회의원이 됐다. 그 해 7월 대정부질문에서 길이 500 킬로에 이르는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4대강은 이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곧이어 총선 선거법 위반과 범인도피 혐의로 기소됐다. 정치적 빈사상태에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묘수로 국회의원직을 던지고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법 재판을 받는 상태에서 더 큰 공직에 도전한다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위기돌파와 공직 담임을 명분과 가치의 문제로 보기 보다는 투자와 계산으로 본 것이 아니었을까.
700만원 선거법 벌금형이 나오자 그는 망명하듯 워싱턴으로 떠났다.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정치적 사망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라면 원스트라이크 아웃에 해당하는 중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0년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직전에 서울로 떠나 만나지 못했지만 미국 행적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었다. 에피소드에서 정치적 반성이나 사망의 흔적을 읽을 수 없었다. 여전했던 것은 그에게서 미래의 대통령 풍모를 읽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그는 2000년에 귀국해서 김경준과 함께 LKe 뱅크를 설립했다. 놀랍게도 선거법 유죄 판결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사면복권을 받아냈다. 그는 부활했다. 그것도 화려한 부활이었다. 2002년 서울시장으로 날개를 달고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2007년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온갖 흠결에도 불구하고 공천에 공천을 거듭한 승승장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더구나 사망 후 부활이 가능했을까. 대선 당시 한나라당은 그를 내세워 온 국민이 돈을 벌수 있다는 허황된 신화 전파에 앞장섰다. 과거 검찰과 법원이 그의 정치적 사망을 결정했지만 당시 여권은 구원투수로 나서 그를 부활시켰다. 언론은 검증을 멈춘 채 받아 옮겼다. 국민은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민주의 근본인 법과 제도, 시스템은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인간으로서의 우리와 우리의 총화인 한국 사회의 민낯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몇 번의 위기에서 오히려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던 것은 혈연, 학연, 지연, 종교연 등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끊임없이 법과 제도와 시스템을 무력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영남-고대-재벌-기독교의 ‘연’이 없었다면 과연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정치권, 기업, 관계, 법조, 언론, 종교에 수없이 많은 ‘연’들이 지금도 청산과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가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의 혐의들 중에서 작은 혐의에 대한 법적 입증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원외교, 4대강, 방산비리 등 거대 혐의의 전모와 금액을 제대로 밝혀내는 일은 길고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아마 상당 기간 또는 영구하게 불가능할지 모른다. 뜻있는 국민들이 보기에 답답하고 섭섭할 수 있다.
이번에도 그는 공사간 수법을 동원해 법과 제도와 시스템을 무력화하려고 할 것이다. 정치보복 프레임을 방어무기로 이미 첨가했고 일부 야당이 이를 도울 태세다. 정작 잘못된 공천의 책임을 져야할 정당이 자신들의 거듭된 실책을 전혀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연’이 정의와 제도를 무력화하는 상황을 이번에는 제대로 막아낼 수 있을까. 쉽게 낙관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