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오시오?”
“난 성주에서 떨어진지 한 달 되었어.”
쓴웃음을 지은 진궁이 다가와 섰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진궁은 여준의 숙소로 찾아온 것이다. 미리 장춘을 시켜 연락을 한 터라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준이 진궁을 안내했다. 여준도 가야 호족 출신으로 진궁의 가문과 인척으로 맺어져 있다. 진궁의 어머니가 여준의 친척인 것이다. 뒤채 마룻방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뒤를 따라온 장춘이 마룻방 밖에서 지켜섰고 여준은 방에 불도 켜지 않았다. 진궁은 이미 기피 인물이다. 딸이 백제군에게 납치된 것을 숨기고 있다가 군주로부터 직위가 박탈된 신분인 것이다. 억울하겠지만 진궁과 접촉했다가 군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리는 진궁을 피하는 실정이다.
“이것 봐, 나마. 내가 그대와 친척이라는 것을 누가 아는가?”
웃음 띤 얼굴로 진궁이 묻자 여준이 따라 웃었다.
“안다면 벌써 그자가 군주께 말했겠지요.”
“그렇군.”
“한 달이 지났으니 아마 저도 직이 잘렸을 겁니다.”
“김유신은 내 구명 편지도 불에 태웠어.”
“당연하지요.”
“시간이 지나면 그대와 내 관계도 알게 될 거야.”
“그럴 것 같습니다.”
여준은 33세, 활을 잘 쏘았고 마술이 뛰어나 여러 번 전장에서 공을 세웠지만 11품 나마에 머물고 있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지 1백년도 되지 않는다. 그 전(前)에는 가야와 백제가 연합해서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때 진궁이 정색하고 여준을 보았다. 방안이 어두워서 진궁의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봐, 나마. 나는 이곳에서 죽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놀란 여준이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어깨를 치켜올린 진궁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마는 살아서 영예를 찾게.”
“왜 죽습니까?”
“대야성을 함락시키겠네.”
“대아찬, 무슨 말씀이오?”
“성문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낮게 말한 진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준을 보았다.
“대야성만 넘어가면 대야주 42개 가야 영토의 성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네.”
“…….”
“그럼 우리 가야인들이 다시 대가야의 주인이 되겠지. 나마, 그대가 42개 가야성 한 곳의 성주는 되지 않겠는가?”
“…….”
“신라가 우리 대가야를 병합시키고 나서 가야족으로 출신한 위인은 김유신 하나뿐이지 않은가?”
“…….”
“내가 5품 대아찬이 된 것도 30여 번의 전공을 세운 덕분이지. 나 같은 경우는 몇 명 안되어.”
“그렇지요.”
어깨를 부풀린 여준이 말했다.
“대아찬은 김유신보다도 더 전공을 세웠지요.”
그러나 김유신은 이미 왕족 대우를 받고 진골 김춘추의 매부이며 대장군에다 2품 이찬이 되었다. 가야인 토호 대부분은 11품 나마 이상으로 승급되지 않는다. 전택도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그때 여준이 물었다.
“대아찬, 백제에 투항하시려는 겁니까?”
“나를 따르겠는가?”
“명분은 있으니 실리까지 보여주시오.”
“옳지.”
진궁이 어둠 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하네, 거사가 성공하면 그대에게 성주를 보장하지 못하겠는가?”
“조건없는 투항은 백제에서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딸 고화의 장래를 보장받았네.”
“대아찬, 살아서 그것을 보셔야지요. 함께 삽시다.”
“그럼 성문을 열겠는가?”
“대가야는 내 땅이요, 내 집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준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먼저 손을 뻗어 진궁의 손을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