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룻방에 앉아있던 계백에게 고화가 다가오며 물었다. 고화는 깔끔한 옷차림에 이제는 피부에도 윤기가 난다. 성주(城主)의 손님이 되어서 머물고 있는 터라 몸은 편해졌지만 아직 얼굴에는 수심이 끼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아.”
오시(12시) 무렵, 잠깐 자고 일어난 계백이 다시 나갈 차비를 하고 앉아있다.
앞쪽에 앉은 고화가 맑은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이제는 눈에 적의는 사라졌다. 대신 두려움과 수줍음이 절반씩 섞여진 것 같다. 계백이 입을 열었다.
“내일 새벽에 출진을 할 테니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불렀어.”
고화는 시선만 주었고 계백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방령께 말씀을 드리려고 했더니 마침 방좌께서 말을 꺼내시더군. 그래서 그대를 내 처로 대우 해달라고 청을 드렸어.”
고화가 시선을 내렸고 계백의 말이 마룻방을 울렸다.
“그러니 내가 돌아오지 않아도 나솔 계백의 처로 대우를 받게 될 것이야. 그런 줄 알고 있도록.”
“나리.”
머리를 든 고화가 계백을 보았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제가 아버지를 사지(死地)에 빠뜨려놓고 이제는 나리까지 몰아 넣는군요.”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어.”
계백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그대가 지금은 내 걱정을 해주는가?”
“아버님께 저는 꼭 살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옳지, 그래야지.”
계백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효도하는 길이고 대의(大義)일세. 내가 전해 드리겠네.”
어깨를 편 계백이 머리를 돌리더니 밖에 대고 소리쳤다.
“덕조 있느냐!”
“예, 나리.”
문 밖에 있었는지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집안 식구들 모두 불러라!”
“예, 나리.”
숨을 다섯번 쉬기도 전에 덕조가 종 둘과 우덕까지 데리고 마룻방 끝쪽에 섰다. 계백이 머리를 들고 덕조에게 말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아씨를 모시고 기다려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나리.”
했지만 덕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 내막을 모르기 때문이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방좌 덕솔 연신님께서 아씨를 내 처로 인정하시고 대우해주신다고 하셨다. 알겠느냐?”
“예, 나리.”
그때서야 덕조가 계백 사후(死後)의 고화에 대한 대우 문제인 것을 알고는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예, 돌아오실 때까지 잘 모시지요.”
머리를 끄덕인 계백의 시선이 고화에게로 옮겨졌다.
“이만하면 되었어.”
자리에서 일어선 계백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내일 새벽에 출진이야. 청으로 들어가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나서 그곳에서 출진할 테니까 여기서 작별이다.”
“나리, 무사히 돌아오시오.”
계백의 등에 대고 덕조가 건성으로 말했다. 마룻방을 나가던 계백의 옷자락이 뒤에서 당겨졌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옷자락을 잡고 선 고화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화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나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죽을 작정으로 떠나는 무장이야.”
그러나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대에게 돌아오려고 죽음을 피하지는 않아.”
계백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