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섬. 지구에서 가장 척박한 땅으로 기억되는 이곳에 세계 각지의 작물 종자를
저장하고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있다. 전 지구적 재앙이 닥쳐도 종자의 멸종을 막고 인류의 식량을 지켜내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일종의 ‘종자 보관창고’다. 기독교 성서에서 대홍수 때 노아의 가족과 동물이 탄 배에 비유해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도 불린다. 한번 잃어버리면 복원이 불가능한 종자의 원형을 살려두고자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중요작물의 종자를 보존중이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문을 연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얼마 전, 생명산업과 농업을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농업분야 미래대응에 대한 반기문 전 유엔(UN)사무총장의 기조강연이 있었다. 북극점 가까운 영구동토층에 우리나라 종자가 보관되어 있다고 언급하며 종자의 무한한 가치를 피력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8년 벼, 보리, 참깨 등 재래종과 농촌진흥청에서 육종한 33작물 1만3천여 자원을 국제종자저장고에 기탁했다. 반 전 총장이 국제종자저장고에서 만난 우리나라 종자는 현재 농촌진흥청 산하 농업유전자원센터에 고스란히 중복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31만 자원을 관리하는 세계 5위의 유전자원 보유국이다. 토종자원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유용자원도 포함돼 있다. 그동안 농촌진흥청이 보유한 자원으로 탄생한 신품종이 지난해에만 105개 품종에 이른다. 이미 1인가구의 증가와 간편함을 추구하는 소비추세에 맞춰 한 입에 먹기 좋은 탁구공 크기의 작은 사과 ‘루비에스’, 씨가 없고 과육이 아삭한 포도 ‘홍주씨들리스’, 껍질이 얇고 부드러운 배 ‘조이스킨’이 개발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다양한 토종종자를 간직하는 것은 미래의 기후변화와 병충해, 전염병에 대비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토종자원은 수천 년 간 우리 땅과 기후에서 살아남은 품종이기에 새로운 품종 육성은 물론, 식품이나 의약품, 생명공학 분야의 신물질 개발소재로 활용될 수 있다. 다양한 유전자원의 확보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우리 종자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는 의미다. ‘종자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우리나라 종자산업은 2013년부터는 추진하고 있는 ‘종자산업육성 5개년계획’을 기점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 전북 김제에 민간육종연구단지가 구축돼 20여개 종자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고, 국책사업인 ‘골든시드프로젝트(GSP)’를 추진하여 수출과 수입대체용 신품종을 고유 유전자원을 활용해 개발함으로써 로열티를 절감하는 성과를 냈다. 금보다 비싼 종자로 알려진 파프리카는 김제, 익산, 남원을 중심으로 전국 재배면적의 4위를 달리고 있다. 국내 소비도 늘고 있고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지로의 수출을 꿈꾸고 있어 효자작목으로 꼽힌다. 지난해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종자분야 산업박람회인 국제종자박람회가 개최되어 종자수출 확대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 첫 성과로 이달 초, 민간육종단지 입주기업이 일본과 상추종자 포함 300만주의 종묘, 약 18억 규모의 수출계약을 맺었다.
100여 년 전 윤봉길 의사는 ‘농업은 인류의 생명창고’라고 주창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속하는 한 농업은 인류의 생명을 책임지는 생명창고라는 뜻이다. 종자의 존속은 곧 농업의 존속이며, 농업의 경쟁력은 종자에 달려있다. 종자가 농업의 핵심이자 인류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