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 내가 고구려에 가야겠소.”
“무슨 말씀이오?”
놀란 김유신이 상반신을 기울였다. 고구려와는 60여년 전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했을 때부터 원수지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 후에 신라는 동맹관계인 백제를 배신, 한강 하류지역을 탈취하고 신주(新州)를 세워 다시 백제와도 원수가 되었다. 더구나 빼앗긴 땅을 탈취하려는 백제하고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聖王)을 전사시킴으로써 불구대천의 사이가 되어있다.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말했다.
“고구려도 백제의 기세에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오. 더욱이 연개소문은 북진정책을 주장하는 호전적인 인간 아니오?”
김유신의 시선을 받은 김춘추가 열에 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신라는 영토의 3할을 잃었소. 고구려는 앞쪽의 당(唐)을 치려면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범부터 제압해야 될 것이오.”
“대감, 백제와 고구려는 동맹관계올시다.”
“서로 필요했기 때문이지. 지금 연개소문은 백제가 부담이 되고 있을 겁니다.”
“대감, 그러면 밀사를 골라 보내시지요.”
“누가 가겠소?”
김춘추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비담 일파가 골라준 밀사는 그저 다녀오는 시늉만 낼 것이오.”
“하지만 위험합니다, 대감.”
“장군이 신주 북방까지 올라가 주시면 나한테 도움이 되리다.”
“그거야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하지만…”
“내가 연개소문을 만나겠소.”
어깨를 편 김춘추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유신을 보았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비담 일당은 당황제에게 여왕을 비난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소. 이러다가 왕국이 망하게 되면 왕이 된들 무얼 하겠소?”
“그 전에 죽임을 당하겠지요.”
“이번 대야주 42개 성이 백제 수중에 들어갔으니 연개소문도 생각을 바꿀 것이오.”
“대감, 차라리 소장이 가지요.”
“아니오, 신라에는 장군이 필요하오.”
쓴웃음을 지은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나같은 왕족은 수십명이나 있지만 대장군은 그대 하나뿐이오.”
“황공하오.”
“장군이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 연개소문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 할 것이오.”
그때 김유신이 긴 숨을 뱉었다.
“대감의 용기는 무장(武將) 100여명보다 낫습니다.”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그렇게 만들었소.”
김춘추가 뱉듯이 말하더니 외면했다.
“왕국을 잃으면 성골, 진골이 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김유신은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계백이 의자왕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백제 사신으로 고구려로 떠나는 인사다. 의자왕은 계백과 부사(副 ) 유만, 화청을 밀실로 불렀는데 배석자는 성충과 윤충, 내신좌평 목부까지 셋뿐이다.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번 대야주 공취로 연개소문이 우리에게 위협을 느낄지도 모른다,”
의자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 원수로 변하는 것이 어디 한두번이냐? 그러니 너는 이것을 연개소문에게 주어라.”
의자왕이 두루마리 밀서를 계백에게 내밀었다.
붉은 천에 금박 글씨로 쓴 왕의 친서다.
“신라 신주(新州)를 공취하면 당항성만 백제가 차지하고 나머지 옛 고구려 영토는 고구려에 반환시키겠다는 밀서다.”
계백이 밀서를 두 손으로 받자 의자왕이 말을 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면 당(唐)의 이가놈이 견딜 것 같으냐? 백제와 함께 북진하자고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