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루의 풍광을 즐기고 최담 유허비가 있는 조그마한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이정표가 있었다.
왼편 산자락을 따라가면 옥류동이 있고, 좀 더 가면 자만동 마을이 있다. 가는 길을 뒤로하고 고개 넘어 낙수정 마을로 향했다.
마을 가운데 오래된 우물이 있었는데 계곡의 물이 이곳에 낙수 되어 우물을 이룬 낙수정이 확실했다.
뒤돌아 고갯마루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만동은 승암산자락을 따라 한벽루 이목대 오목대를 잇는 능선 밑으로 형성된 향교 북쪽의 경사진 마을이었다. 옥류 2길을 따라 내려오니 입구가 나왔다. 오목대 쪽으로 평지 길을 가다 보니 드디어 자만동 마을이 보였다. 자만동2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자만동금표라는 표지석이 어느 집 담장 밖에 외로이 서 있었다.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 일원을 조선왕실의 성지로 조성하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거나 몰래 묘지를 쓰는 것 등을 금하는 표지석이었다.
원래는 4개가 있었으나 다행히 남의 집 담장 돌로 사용되었다가 발견되어 이곳에 세워졌단다. 아마도 오목대와 이목대를 성역화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왕조의 정신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인 만큼 보호각이라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재질은 전주에서 나오는 ‘전주석’으로 쑥돌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불현듯 이곳이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를 갖춘 명당자리임이 확실했다. 뒷산 발리산과 좌우를 감싸주는 날개며, 왼편에서 흘러들어와 마을을 감싸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전주천의 형국이 풍수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전주에서는 아마 이만한 형국을 갖춘 마을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씨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이라고도 하며 이목대의 이(梨)자를 이(李)자로 바꾸어 이목대(李木臺)라고 칭하기도 했나 보다.
자만동 그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 옛 시가에서 나왔다고 전하는데 자만(滋滿)은 자만(子滿)으로 자식이 많이 불어난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아래편에는 향교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자만동1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옥마을 외곽에 자리한 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이성계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나고 자란 곳인데 최근에 이곳을 벽화마을로 조성했다.
마을 아래편 기슭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쓴 유허비가 있다. 조경단을 조성한 그 이듬해인 1900년 목조대왕 구거지로 전해지고 있는 자리에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그런데 오목대 맞은편 육교 아래 있다가 철로가 철거되고 기린로가 뚫리면서 주택가 쪽으로 이전된 것이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협소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미안한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자만동 마을을 돌아보며 잠시나마 조상들의 옛 자취를 생각해볼 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대우받지 못한 조상의 발자취를 본래의 위치로 돌려놓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대영 씨는 전주 서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했으며 현재 어진박물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가는 옛말 모음집 <그게 시방 무신 말이디아> 를 냈다.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