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출신 통일운동가 한상렬·이강실 부부 목사] "체포된 곳에서 남북정상 만나니 뭉클"

2010년 6·15 선언 행사 방북했다 귀환 뒤 옥살이
한 목사, 최근 6개월간 전국 산 돌며 ‘통일염원 기도’
“‘통일은 미래 유산’깨닫고, 민간 교류 활성화 필요”

▲ 26일 한몸평화문화관에서 한상렬·이강실 부부 목사가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성공적인 회담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무단 방북(訪北)’을 결행하면서 까지 남북 통일에 대한 염원을 보여줘 우리나라 통일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한상렬 목사(67)가 전주에 돌아왔다. 지난해 10월 전주를 떠나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산상기도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만난 한 목사는 다시 ‘평화 통일’을 외쳤다. 통일을 위한 산상기도를 마치고 전주로 복귀한 그의 웅변은 예사롭지 않았다.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한몸평화문화관에서 만난 한상렬·이강실 부부 목사는 하얀 두루마기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이 많이 설렙니다. 분단의 아픔 속에서 많은 이가 소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기념적인 날 축하는 물론, 감사의 마음도 함께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부부 목사에게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뭉클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한 목사는 “2010년 북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판문점과 남측 자유의 집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넘는 순간, 국정원 관계자에게 체포당했다”며 “바로 그 곳이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만나게 될 군사분계선(MDL)”이라고 말했다.

그해 6월 10일 한 목사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갔다가 70일 만에 귀환했다. 당시 통일연대 상임대표를 맡으며,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 행사를 북한에서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서는 이를 불허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남측 대표로 북한의 환대를 받은 한 목사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당시 건강 악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나지 못했다.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묵으며, 평양 시내와 백두산, 개성공단 등 북녘을 둘러봤다.

한 목사는 중국 북경에 있는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북한에 홀로 갔다.

무단 방북 70일 만인 2016년 8월 20일 비공식 일정을 마치고 판문점으로 내려왔고, 곧바로 대기하던 국정원 직원에게 체포됐다. 그는 북한 정권을 찬양한 혐의(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한 목사는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 행사를 앞두고, 남측 각계 인사 300명이 방북을 계획했는데, 당시 이명박 정권이 불허했다”며 “5·18 묘역에 가서 1인용 천막을 치고, 11일간 단식 밤샘 기도를 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홀로 방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태어난 한 목사는 1969년 전북대학교 농화학과에 진학했으며,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전국의 재야세력이 통합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공동대표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보안대에 끌려가 광주 상무대에서 군사 재판을 받았다. 그의 억울한 옥살이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게 된다. 당시 고문을 당하면서 용기와 비겁함이 교차했다는 한 목사는 “왜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지 곰곰이 생각했는데, 통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평화통일 운동에 나선 계기를 밝혔다.

부인 이강실 목사(60)도 그 못지않게 통일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77년 전북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이 목사는 남편 한 목사를 전주 남문교회에서 만났다. “박정희 정권의 엄혹한 시대에 남편을 만났고, 민주화·통일 운동을 함께 하기로 마음이 통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와 전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를 역임하는 등 여성 주도의 평화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남편이 유서와 편지를 남기고, 중국으로 갔을 때 ‘북한에 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혀야 한다….’유서에 문익환 목사가 쓴 ‘마지막 시’를 인용했죠. 방북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자 경찰이 집을 압수 수색했는데, 별로 놀라진 않았어요. 우리를 북한 정권의 수괴 정도로 본 거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갖은 역경 속에서 부부의 통일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지난해 10월 19일 새벽 통일의 문을 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꿈을 꾼 한 목사는 돌연 전주를 떠나 산속을 떠돌며 기도에 나섰다. 한 목사는 “지리산, 만덕산 등 전국의 산을 다니면서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며 “지난달 말 기도를 마치고 전주에 돌아오니 공교롭게 남북 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에게 남북 정상회담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과거 보수 정권에서는 엄두조차 못 낼 남북 대화, 역대 3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최대 이유로 ‘촛불 혁명’을 꼽았다. 한 목사는 “촛불 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구속됐고, 새 정권이 들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바로잡고 있다”며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경색됐던 남북에 비로소 봄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갈 길이 구만리다. 이들 부부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이란 표현까지 쓴다. 한 목사는 “우선 상황은 낙관적으로 예상하지만, 미국이라는 변수가 있다”며 “남북 정상회담이 모두의 염원이지만,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특히 그것을 보는 미국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변수보다 중요한 건 상수(上數)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통일이 미래 유산이라는 상수를 깨닫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남북 주민의 의식이나 생활 양태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게 핵심이다. 정치가 아닌, 민간 중심으로 ‘남북주민 생활통일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법도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