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에서 만나는 가야이야기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흔적을 이제 새롭게 해석해야

▲ 김승희 국립전주박물관장

최근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가야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중심으로 서술되었고, 가야에 대한 사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가야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1970년대 이후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가야 유적이 발굴조사 되고 있으며,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가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크게 나아졌다.

그러나 영남지역 밖의 가야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특히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위치한 가야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행히 전북지역 연구자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로 최근 많은 가야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1982년 남원 월산리 고분군을 시작으로 최근의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발굴조사 되어 우리 지역 가야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땅을 깊게 파서 돌로 덧널을 만드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라는 구조에 많은 토기와 무기 등을 부장하는 가야의 장례풍습을 따르고 있다. 부장된 토기의 모양이나 조합 관계는 대체로 경남 고령지역 대가야의 것과 유사하다. 흔히 고고학에서의 장례문화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큰 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없다면 오랜 기간에 걸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런 연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전북 동부 산악지역의 가야 유적을 대가야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전북 지역 가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대가야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기는 형태적으로는 대가야와 유사하지만 보다 곡선적이며 무게의 중심이 아래쪽으로 쏠리는 등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확인된다. 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영남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국 청동거울과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진 천계호(天鷄壺)라고 부르는 닭머리 모양 주둥이를 가진 청자 주전자, 그리고 금동신발 등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당시 최고위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백제 중앙정부가 주변지역의 여러 작은 나라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건낸 위세품들이다. 이러한 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백제가 이 지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나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에서 나오는 기문국(己汶國)을 섬진강 유역으로 비정한다. 그리고 이 지역 정치세력이 백제와 대가야 사이에 있으면서 번갈아 복속되었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유물의 출토 양상은 어느 한 세력의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북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정치세력들이 인접한 가야의 장례문화를 받아들여 가야와의 동질의식을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면서도 백제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독립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러한 특성은 문화의 혼종화나 혼합문화가 당시 성립되어 있음을 표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 전북 가야 의 독자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오백년 전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꿈과 살아가던 모습을 무덤 속, 또는 여러 생활터전에 남겨 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꿈과 다양한 흔적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