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이 보낸 관리가 돌아갔을 때 김춘추가 김인문에게 말했다. 얼굴이 굳어져 있다.
“내가 경솔했다. 저놈들은 백제하고 단단히 결속되어 있구나.”
“아버님, 저를 인질로 두고 가시지요.”
김인문이 침착하게 말했지만 김춘추가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저놈들은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조금전의 그놈을 보낸 것이다.”
김춘추가 옆쪽에 앉은 부사(副使) 김성준에게 말했다.
“이보게. 자네와 나, 그리고 인문이하고 셋이 군관 셋만 데리고 빠져 나가기로 하세. 모두 하인으로 변장을 하고 하나씩 저택을 나가기로 하지.”
“대문 밖에는 경비병도 없으니 지금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관(武官)인 김성준이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나머지 일행은 그대로 놔두지요. 알려지면 저놈들이 눈치를 챌 것입니다.”
“안됐지만 하는 수 없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성준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김춘추가 겉옷을 벗으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호구(虎口)에 들어왔다.”
잠시후에 영빈관을 하인 행색의 사내들이 하나씩 빠져나왔다. 영빈관 안팎으로 저택의 하인과 신라측 사신 일행이 뒤섞여서 붐비고 있었기 때문에 저택 하인 차림의 사내들이 나가는 것은 아무도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김춘추 일행이다. 김춘추도 두건을 눌러썼고 수염까지 깎아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연개소문의 저택 대문은 활짝 열려져서 하인과 군사들이 무리지어 오가고 있었는데 나가는 사람들은 검문하지 않는다. 무사히 대문을 나온 여섯은 곧 대로 옆길로 꺾어져서 모였다.
“말을 사서 달려야 합니다.”
김성준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곧 발각이 될테니 그때는 도처에서 검문을 할 것입니다.”
“이곳은 말이 흔합니다.”
군관 하나가 김성준에게 말했다.
“먼저 남문 밖으로 나가 계시면 소인이 말을 사오지요.”
“그것이 낫겠다. 우선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
“올적에 보았더니 남문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작은 개울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개울가 주막에서 뵙지요.”
“그럼 네가 말을 구해오너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군관 하나가 나섰기 때문에 김춘추가 머리를 끄덕였다.
“서둘러라.”
이제 김춘추 일행은 넷이 되어서 남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올적에도 남문으로 왔기 때문에 길은 안다.
“대감, 저기 옷가게가 있습니다. 먼저 가시면 소인이 옷을 사 오지요.”
김성준이 거리 끝쪽의 옷가게를 보더니 말했다.
“알았네. 먼저 가겠네.”
김성준이 떨어져 나가자 이제 일행은 김춘추 부자(父子)와 군관까지 셋이 남았다. 서둘러 걸으면서 김춘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연개소문이 나를 잡으면 죽일 것이다.”
김인문은 대답하지 않았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온 소득은 있었다. 연개소문은 듣던대로 오만불손한 놈이었지만 고구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