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마음에 드느냐?”
다음날 왕궁의 청에서 만난 의자가 계백에게 물었다. 백관이 모두 도열해 서 있는 상황에서 의자가 물은 터라 계백이 당황했다.
“예, 대왕.”
계백의 관등은 한솔이니 좌평, 달솔, 은솔, 덕솔에 이은 제5등급이다. 4등급 덕솔(德率)이면 군(郡)의 군장(郡長)으로 나갈 수 있고 달솔이 맡은 방령 밑의 방좌(方佐)가 될 수 있다. 아직 한솔이 고위 관직은 아니다. 그때 의자가 머리를 들고 백관들을 둘러보았다.
“한솔 계백은 대야성 함락의 1등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 공으로부터 동맹의 약조를 받아왔다. 대백제의 공신이다.”
그때 병관좌평 성충이 나섰다.
“대왕, 계백은 아직 약관으로 칭찬이 과하시면 분수를 모르게 됩니다. 삼가 주시옵소서.”
백제에는 최고위 관직인 좌평이 5명 있었는데 성충이 그 중 으뜸인 대좌평이다. 50대 초반의 성충이 의자를 올려다 보면서 말을 이었다.
“대왕, 계백을 친위군 기마대장으로 삼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보류시켜 주옵소서.”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친위군 기마대장은 4품 덕솔 관등이 맡은 자리다. 대왕이 병관좌평 성충에게 그리 지시를 내렸단 말인가? 모르고 있었던 일이다. 그때 의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좌평, 나이가 적다고 공을 적게 평가하지 마라. 계백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경륜이 적거나 경솔하지 않다.”
“압니다.”
성충도 지지 않는다. 백관들은 숨을 죽였고 성충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계백을 대백제의 동량으로 키우려면 더 단련시켜야 합니다. 대왕”
“으음.”
의자의 신음이 낮게 울렸다. 그때 서방 방령 달솔 해재용이 나섰다.
“대왕, 한솔 계백을 서방의 한산성주로 보내주시옵소서.”
백관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졌다. 해재용이 소리치듯 말을 잇는다.
“한산성 근처에 해적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모두 내륙으로 도피해서 바닷가 인근이 황무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의자가 물었다.
“한산성주가 아직도 공석인가?”
“예, 대왕”
대답은 성충이 했다. 성충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의자를 보았다.
“전(前) 성주 국겸은 병이 들어 도성으로 옮겨와 거동을 못 한지가 반년 가깝게 되었고 성주대리를 맡은 나솔 육기천은 지난달에 해적과 싸움에서 화살을 맞고 운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계백을 보내란 말인가?”
그때 계백이 한걸음 나섰다.
“대왕, 소장을 한산성주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곳에서 해적을 소탕하겠습니다.”
“내가 병관좌평의 술수에 넘어갔다.”
쓴웃음을 지은 의자가 옥좌에 등을 붙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친위대 기마대장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했을 때는 아무 소리를 안 하더니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의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떠올라 있다.
“왕의 독선을 막겠다는 의도 아닌가?”
성충이 시선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고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좋다. 계백을 한산성주로 보낸다. 그래서 더 단련시켜 보도록 하자.”
이렇게 어전회의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