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시오, 병관좌평. 나 좀 봅시다.”
머리를 돌린 성충이 그들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충신들이 다 모였군.”
“저쪽에서 이야기합시다.”
흥수가 턱으로 앞쪽 기둥을 가리켰다. 구석진 곳이다. 삼삼오오 나가던 관리들이 그들을 향해 절을 했다. 조정의 실권자들인 것이다. 모두 40대 중후반으로 의자보다 연상인데다 선왕(先王)인 무왕(武王) 시절부터 신임을 받고 있던 원로들이다. 넷이 둘러섰을 때 흥수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성충을 보았다.
“당신은 대왕께 직언을 한다는 구실로 왕권을 약화시키고 있어. 그 의도가 수상하오.”
“아하하.”
짧게 웃은 성충이 흥수와 의직, 자신의 동생 윤충까지를 보면서 말했다.
“백관 모두 들었겠지. 대왕의 인사가 중구난방, 편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무엄하오!”
버럭 소리친 의직이 성충을 노려보았다.
“대왕이 당신 노리갯감이요? 직언을 한답시고 당신은 대왕을 능멸하고 있어! 내가 용서하지 못하겠소!”
“나를 죽이기 전에 잠시만 여유를 주시게, 방령.”
성충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왕비마마를 죽일테니 그때 나를 베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왕비를 죽인 대역무도한 놈으로 말이네.”
그 순간 셋은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굳혔다. 얼굴이 창백해졌고 흥수는 수염 끝이 벌벌 떨렸다.
“이보시오, 형님.”
놀란 윤충이 남 앞에서는 절대로 부르지 않던 ‘형님’소리까지 했다.
“무슨 그런 망발을…….”
윤충이 목소리를 떨었을 때 성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 알고 계시지 않는가?”
셋은 숨소리도 죽였고 성충의 말이 이어졌다.
“왕비 교지가 신라 첩자 연기신 놈을 싸고도는 것이 아니라 교지가 첩자라는 것을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대왕은 자만심에 빠져있는거네.”
“…….”
“그까짓 첩자 한 놈 갖고 뭘 그러느냐? 또는 여자가 뭘 하겠느냐? 하는 동안에 궁궐이 썩고 조정이 썩고 나라가 썩네.”
“…….”
“내가 계백 꼬투리를 잡고 대왕을 끌어당겼다는 건 대왕도 알고 계실 것이고 그 이유도 아실 것이네.”
“이보오, 대좌평.”
조금 진정한 흥수가 반걸음 다가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도 연기신이 첩자이고 왕비께서 그놈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방법이 틀렸소.”
“아니, 대왕한테는 이 방법뿐이야.”
성충이 머리를 저었다.
“훗날에 후손들이 성충을 대백제의 역적으로 기억하게 되더라도 나는 눈에 보이는 역적을 토벌하고 순사하겠네.”
기둥 옆에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이것이 대백제의 그늘이다. 왕비 교지는 덕솔 연기신을 먼 친척이라면서 측근에 두었는데 신라를 여러 번 오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연기신이 왕비의 친척이 아니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