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오르면서 계백이 말했다.
“내 선친께서 남기신 유언이오.”
“그렇습니까?”
화청이 말을 몰아 계백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연기신과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태왕비의 명을 받고 현동성에 가서 신라쪽 조상들께 제사를 지낸다고 했소.”
“태왕비가 신라공주였다지요?”
화청은 수나라 출신이라 선화공주는 겪지 못했다. 그때 옆에서 듣던 문독 곽성이 거들었다.
“선왕(先王) 때부터 태왕비는 신라를 싸고 돌았지요. 태왕비 주변에 첩자가 깔려있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지. 더욱이 왕비가 그렇다면야….”
화청이 말을 이으려다가 계백의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계백도 잠자코 말을 몰았다. 허실이 없는 인간은 없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신라는 골품 귀족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내전(內戰)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며 고구려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전권(全權)을 쥔 것 같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하다.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사후(死後)가 불안한 상황이다. 그리고 백제는? 왕실 내부에서 불씨가 키워지는가?
한산성,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 석성(石城)이나 허술하다. 전(前)임지였던 칠봉성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규모는 2배 이상이나 커서 성 안의 주민수가 1만이 넘었다. 모두 해적을 피해 성안으로 들어온 피난민이나 같다. 성의 청에 앉은 계백에게 이번에 사비도성으로 전임이 된 성주대리 육기천이 보고했다.
“군병은 1천2백5십명, 그중 기마군이 4백3십입니다.”
육기천은 지난번 해적의 살을 맞아 한쪽 팔을 목에 걸고 있다. 무관으로 나솔이나 체격이 왜소했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당이 대륙을 평정한 후에 연안의 해적 세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당군에 쫓긴 각 세력이 해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세력이 강한가?”
계백이 묻자 무관 하나가 대답했다.
“진헌창이 이끄는 남진(南辰)의 해적이 수만명입니다. 한번 침공해올 때마다 수십척씩 무리를 지어 오는데 보통 2천명 가까운 군사가 상륙합니다.”
그렇다면 해적이 아니라 반란군이나 같다. 계백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세히 말하라.”
“예, 이쪽 서방(西方)의 해군력은 무역선 보호에 맞도록 전선(戰船)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적선은 육지에서 노략질을 목표로 삼은 대형 상륙선입니다. 배가 크고 수십명씩 노잡이들이 있는데다 견고합니다. 우리 전선이 따라 잡아도 그쪽은 궁수가 백여명씩이 있어서 가깝게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수군항까지는 얼마나 되나?”
“30리 거리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화청을 보았다.
“내일은 수군항에 가봐야겠소.”
“그렇습니다. 육상군과 수군이 서로 연합해야 해적을 막습니다.”
그때 육기천이 말했다.
“수군항의 항장(港將) 국창님은 병관부달솔 진재덕님의 지시만 받습니다.”
“무슨 말이오?”
화청이 짜증난 기색으로 물었더니 육기천은 외면한 채 대답했다.
“국창님은 내륙의 성이나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소. 우리하고 한번도 연합전선을 편적이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