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그리는 그림

새들에겐 휴전선 없어 어디 남한의 새가 있고 북한의 새가 있으리오

▲ 정군수 석정문학관 관장

4·27 남북정상회담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장면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다. 두 정상은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를 맞대기도 하며 판문점 도보의 다리를 걸었다. 세상의 눈과 귀가 판문점으로 쏠렸지만 무성필름처럼 두 사람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오십 미터 도보의 다리를 걸어 두 정상은 마주 앉았다. 하얗게 핀 꽃도 보였다. 따라온 북한의 기자를 가라고 김 위원장이 손짓하였다. 단 둘의 만남, 일대 일의 만남. 우리는 이것을 독대라 하였던가. 두 정상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할 때부터 쓰던 우리말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통역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밀담이었다. 그 두 정상이 건넨 말들은 무엇일까. 들리지 않아서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워 더 큰 의미로 전달되는 저 밀담의 내용은 무엇일까? 세상이 다 드러나는 백주대낮에 수많은 카메라를 불러놓고, 카메라로 찍히지 않는 둘만의 소리로, 어떻게 하면 알 것도 같은, 알아도 도무지 형상화하기 어려운 비밀을 두 정상은 그 곳에서 만들어냈다. 건곤일척의 담론이 아니라도, 한 촌부의 이야기라도 좋았다. 도보다리에서 두 정상의 만남은 구어체로 풀어내기 힘든 정치적 상징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연출할 수 없는 역사의 한 획을 두 정상은 서슴없이 긋고 있었다. 북쪽의 찬바람이 가슴을 뻥 뚫고 남으로 내려오듯, 아니 남쪽 더운 바람이 DMZ를 지나 북으로 치닫듯, 그 정치적 상징은 크고 위대해 보였다. 열강들 틈에서 작고 초라했던 두 동강난 한반도가 광개토대왕 때처럼 커보였다. 남루를 걸치고 살았던 동포의 자존심이 한 순간 살아나는 듯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판문점을 지배한 시간은 사십 분, 그 시간은 가장 찬란한 빛과 가장 질긴 그늘을 날금과 씨금으로 해서 짜낸 비단이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육십 여년의 길고도 먼 시간을 사십 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하여 짜낸 피륙이었다. 그 비단은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서 누리고 살아갈 시간이며 세월이었다.

소리가 있었다. 두 정상의 무성필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낮말을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던가. 훤한 대낮, 꽃그림자 속에서, 풀숲에서, 나무위에서 배경음악처럼 새소리가 들렸다. 공개된 비밀장소에서 두 정상의 밀담을 새들은 알고 있었을까. 알아도 모른 채했을까. 배경음악은 들리는데 두 정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조류학자는 그 곳에서 열세 종류의 새소리가 들렸다 한다. 꿩, 박새, 청딱다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새들에게는 휴전선이 없으니 남과 북이 없다. 어디 남한의 새가 있고 북한의 새가 있으랴. 그들의 하늘은 자유의 하늘이고 평화의 하늘이다. 새들은 DMZ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면 남북을 오고간다. 새들 뿐이랴. 풀꽃들도 바람에 풀씨를 날려 남북을 오고간다. 그 하늘은 미국의 하늘이나 중국의 하늘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이다. 조류학자가 굳이 새소리를 찾아서 열거한 것은 통일에 대한 비원이 서려있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서 일까.

그렇게 해서 봄날은 갔다. 그 뒤 5월 26일 판문각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보물상자 같기도 하고 판도라상자같기도 한 내용들이 쏟아진다. 평화협정은 정치적, 국제법적으로 평화를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분쟁 종식 방법이지만, 산은 험하고 물은 깊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로 위로를 하고 있지만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비구름이 있고 햇볕이 있어 언제 천둥 번개가 치고 볕이 뜰지 모른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경천동지할 대타협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일장춘몽’이라든지, ‘남가일몽’이라는 말이 오늘의 한반도에 다시없기를 두 손 모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