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조가 인사를 했을 때는 오시(12시)무렵, 계백이 수군(水軍) 조련을 마치고 수군항의 진영으로 돌와왔을 때다.
“오, 왔느냐?”
두 달 만에 보는 덕조다. 덕조가 도성에서 고화를 모시고 온 것이다. 도성의 저택이 크고 잘 갖춰진 데다 시장에는 온갖 귀물(貴物)이 넘쳤고 의식주가 편리한데도 고화는 이곳으로 오기를 고집했다. 그래서 마침내 저택에 집 지키는 종만 남겨두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내가 저녁때 들어간다고 해라.”
“네, 주인.”
대답한 덕조가 꾸물거리더니 상석에 앉은 계백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다.
“주인.”
“뭐냐?”
“마님이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모시고 와?”
그때 덕조가 무릎걸음으로 두걸음 다가와 앞쪽에 엎드렸다. 청의 마루방에는 둘 뿐이다. 계백과 집안 집사인 덕조가 만나는 터라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덕조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인, 마님의 친척 행세를 하고 따라왔지만 실은 태왕비 마마의 시녀입니다.”
“……”
“태왕비께서 마님께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녀를 나리께 데려가라고 부탁을 하신 것이지요.”
“태왕비께서?”
계백은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을 들었다. 태왕비 선화공주는 지금 궁 안에서 연금상태다. 그러나 변복을 하고 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대왕의 모친인 것이다. 가끔 선왕(先王)의 묘에도 가고 사찰에서 불공도 드린다.
덕조가 말을 이었다.
“예, 열흘쯤 전 저녁 무렵에 찾아오셨습니다. 불사에 가셨다가 들렸다고 하셨는데 변복을 하고 계셨지요.”
“……”
“그때 시녀 서진을 두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전할 것도 알고 계시더군요. 서진을 데려가 나리를 만나게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
“서진을 만나고 나서 대왕께 사실을 말씀드려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괴이하다.”
마침내 어깨를 편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라 있다.
“태왕비께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구나.”
덕조도 계백의 주도하에 신라 첩자 일당이 소탕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일에 태왕비와 왕비가 연루되어 둘 다 연금상태라는 것도 아는 것이다. 덕조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주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님께서도 주인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시녀인 서진님도 주인의 뜻에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
“이 일을 집안에서 누가 아느냐?”
“네, 저하고 마님, 그리고 우덕이까지 셋입니다.”
“셋이라고?”
“집안 종들은 서진님을 마님이 도성에서 만난 먼 친척인줄로 압니다.”
“그걸 믿겠느냐?”
“태왕비께서 대갓집 부인 행세를 하고 계셔서 모두 깜박 속았습니다. 시녀 서진님도 재치가 있으셔서 다른 종들이 모두 마침 친척인줄 믿습니다.”
그때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