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뒷산에 인민군 무덤이 있었다. 6·25때 이북으로 가지 못하고 숨어있던 어린 인민군이 배고파 감자를 캐먹다 아군한테 총 맞아 죽은 시체를 묻어준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은 헐어져 겨우 흔적만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무덤 옆에 가는 것을 꺼려 그 곳은 적막하였다. 그런 무덤 앞에 하지 무렵이면 꿩알만한 감자 몇 알이 놓여 있었다. 밭 매러 가던 어머니가 싸가시던 감자를 어린 인민군 무덤 앞에 놓아둔 것이다. 해가 긴 하지가 지날 때까지 감자는 빼빼 말라서 허기진 인민군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필자는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에다 상상을 깃들여 졸시 「하지」를 썼다. 필자가 그 시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적군에 대한 포용과 사랑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어린 인민군의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하지가 되면 어린 인민군이 / 감자밭으로 기어나옵니다 / 삐비꽃도 날아가버린 산에서 / 인민군 무덤 앞에 놓인 감자알이 / 우리 어머니와 인민군 어머니가 / 서로 등 다독여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어머니와 인민군 어머니가 서로 등 다독여주는 것은 현실적 상황은 아니다. 6·25의 상처와 갈등을 감자와 어머니를 통하여 화해하고 포용하는 사랑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모성애와 같은 동포애가 이 산하를 구하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신념에서였다.
경기도 파주시에는 ‘북한군 묘역’이 있다. 우리의 묘는 대부분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과는 달리 이곳의 묘는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다. 넋이나마 북쪽 고향땅을 가까이 바라보도록 배려하여 민간인 통제선 가까운 곳 북향에 묘지를 택했다 한다. 무명의 북한군 작은 묘비석에는 유해가 발견된 날짜와 장소가 새겨져 있다. 우리 목숨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던 또 다른 주검을 위하여 아늑한 묘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적군의 유해를 이처럼 안장한 묘지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라 하니, 적군의 시신을 껴안고 있는 산하가 고맙고 동포애가 눈물겹다.
구상 시인의 「초토(焦土)의 시 8」 에는 ‘적군 묘지 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시는 6·25라는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적군묘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용은 무덤속의 적군에 대한 적대 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와 인간애, 그리고 관용과 연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였지만, 이제 전쟁이 종결되고 그들의 무덤 앞에 섰을 때는, 동족으로서의 연민의 정이 느껴질 뿐이다. 이러한 연민의 정은 적군의 시체를 양지 바른 곳에 묻는, 인도주의적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동질감으로 발전하고 있다.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 썩어 문들어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이 시는 분단의 비극을 고발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인내로 참회에 도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의 원은(怨恩)을 시인 자신의 희망으로 전환시켜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살아서는 너희와 나와 / 미움으로 맺혔건만 /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 풀지 못한 원한이 / 나의 바람 속에 깃들여 있도다” 시인은 살아서 미움으로 맺힌 적군의 한이 죽어서 통일이라는 소망으로 시인의 뜻과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시의 제목 ‘초토’는 민족의 비극인 6·25로 폐허가 된 조국산하를 뜻한다. 이념의 대립이 칼날 같았던 시기에 압력과 위협을 당하면서도 ‘적군 묘지 앞에서’를 쓴 시인은 오늘의 한국 모습을 예견한 것 같다. 초토가 된 산하에 수십 성상의 구름이 흘러가고, 이제 우리의 조국은 평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치닫고 있다. 비바람 뒤에 피어나는 꽃처럼 화해와 포용으로 서로를 감싸야 할 때가 왔다. 어린 인민군 무덤에 감자를 갖다 놓았던 우리 어머니의 신앙 같던 사랑이 통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