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반복되는 것이냐?”
마침내 당황제 이세민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목소리가 신음을 뱉는 것 같다. 둘러선 장수들은 머리를 숙였고 이세민의 목소리가 바위처럼 굴러떨어졌다.
“이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해야 된단 말인가!”
그동안 수많은 전략이 나왔지만 모두 채택되지 못했다. 안시성을 놔두고 뒤를 쫓지 못하도록 5만 군사를 배치시킨 후에 곧장 고구려 심장부로 진군하자는 의견이다. 그러나 황제의 친정(親征)을 장수들을 내보내어 싸우는 것처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말에 아무도 더 주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군은 초조해졌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안시성의 사기는 높아졌다. 그래도 당군은 쉽게 철군하지 않았다. 황제의 친정인 것이다. 이세민의 탄식처럼 ‘또’ 패주했다가는 수(隋)양제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바로 천하의 중심(中心)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계백에게 위사장인 하도리가 달려왔다. 저녁 무렵, 성안 사택을 숙소로 쓰고 있는 계백이 마악 저녁상을 물렸을 때다.
“은솔, 백제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백제에서?”
놀란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일행이 보였다. 앞장선 사내는 덕조다. 깜짝 놀란 계백이 눈만 크게 떴을 때 덕조가 소리쳤다.
“주인! 다시 뵙습니다!”
“웬일이냐!”
“아씨가 보내셨소!”
다가온 덕조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마루에서 내려간 계백이 덕조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다가 숨을 들이켰다. 덕조의 뒤에 서 있는 사내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희고 깨끗한 얼굴, 두건을 썼지만 소년같다.
“아니, 네가…….”
그때 소년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옆으로 다가온 덕조가 말했다.
“아씨가 시중을 들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때서야 계백의 시선이 미소녀에게서 떨어졌다. 바로 서진이다. 태왕비의 시녀, 신라의 첩자 취급을 당하고 계백의 사저에 갇혀 지내던 서진이다. 사비도성으로 옮겨 왔을 때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고화가 보내다니, 몸을 돌린 계백이 덕조와 서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서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리, 전장에서라도 모시고 싶습니다.”
백제를 떠난지 반년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