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 지는 데는 선후가 있어도 모두가 가을꽃

조미애 시인·전북시인협회장

서늘한 바람에 잠이 깼다. 문이 열려 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니 유리창에 부딪힌 햇살에 눈이 부시다. 문틈으로 새어 든 바람마저 차게 느껴지는 것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이리.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곱게 피던 나팔꽃이 지고 그 자리에는 왕관모양으로 씨가 들어섰다. 초록의 잎은 갈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더위에 자라지 못했던 화초들이 늦게 싹이 나고 줄기도 굵어지더니 하얗게 고추 꽃이 피고 연이어 풍선덩굴과 분꽃도 피었다. 지난여름 폭염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피어났을 것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라도 꽃을 선물해준 그들이 고맙다.

가을이 되면 상허 이태준의 수필이 생각난다. 그는 ‘과꽃은 가을이 올 때 피고 국화는 가을이 갈 때 이운다. 피고 지는 데는 선후가 있되 다 마찬가지 가을꽃이다…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라고 했다. 상상만으로도 풍경들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난밤에 찬비를 맞으며 돌아온 우산이다. 아침에 나와 보니 거죽에 조그만 나뭇잎 두엇이 아직 젖은 채 붙어 있다. 아마 문간에 선 대추나무 가지를 스치고 들어온 때문이리라. 그러나 스친다고 나뭇잎이 왜 떨어지랴 하고 보니 벌써 누릇누릇 익은 낙엽이 아닌가!’ 글에서 가을날의 온도를 느낄 수 있다.

몇 해 전에 나팔꽃씨 몇 개를 가져와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심었는데 잘 자라서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되어 꽃그늘을 이루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노란 꽃이 피었던 분꽃을 살펴보니 어느새 꽃이 진 자리에 씨가 맺혀있다. 풍선덩굴도 올해 두 개가 열렸다. 아직은 녹색이지만 탱탱한 햇살을 받고나면 잘 익은 씨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씨를 받게 되면 분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문화행사가 많은 가을이다. 지역문화축제를 비롯하여 음악, 미술, 무용 등의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소식을 들을 때면 가끔은 행사를 위한 행사인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요란한 것이 시끄럽고 버겁기도 하지만 풍성한 볼거리가 있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웃음이 있어서 좋다. 다만 해마다 계속되는 축제나 문화행사가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축제와 행사가 제한된 소수 사람들만의 잔치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모름지기 축제라면 지역의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여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간과 공간을 배려함으로써 진정한 마을 굿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문단의 가을은 꽃밭처럼 풍성하다. 각각의 색깔과 향기를 지닌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자세히 보면 예쁜 작은 꽃이다. 작가의 맑고 곧은 정신이 담긴 씨앗이면 충분하다. 세상에 하고 많은 꽃 중에서 나와 인연이 되고 씨앗을 맺어 더욱 소중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황량한 들판이면 어떠하리. 동인지 출간과 문학상 소식들이 꽃씨가 되어 날아온다. 문단의 주인은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 꽃밭에서 꽃들이 피고 지는 것처럼 피고 지는 데에는 선후가 있어도 모두가 가을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