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백제] (205) 11장 영주계백 1

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다음날 저녁, 이또의 거성(居城)인 야마토(大知)성에 계백이 입성했다. 이또는 영지 5만 7천석을 보유한 영주였지만 백제계 명문가였다. 그러나 왜 왕가와 소가씨 가문에 불만을 품고 은밀하게 신라계와 내통하다가 멸문을 당한 셈이다. 멸문을 당했다고 하지만 이또와 소수의 측근, 병사 일부가 죽었을뿐 나머지는 다 살아있다. 가족도 아직 멀쩡하다. 선봉대에 의해서 성문은 이미 활짝 열렸고 살아남은 가신(家臣)들이 모두 청 앞 마당에 꿇어앉아 있었는데 새 영주의 한마디에 목숨이 달려있는 상황이다. 역적인 영주가 참살된 경우에는 가신들도 모두 죽이는 것이 통례인 것이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다. 계백이 측근들과 함께 청에 올랐을 때 선봉대를 이끌고 먼저 온 하도리가 소리쳐 보고했다.

“주군(主君), 역적 이또의 가신중 5백석 이상을 받은 자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이미 마당에는 횃불을 여러개 켜놓고 모닥불까지 만들어서 화랑이 충천했다.

하도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모두 32명으로 그중 4명은 이번에 이또를 따라갔다가 죽었습니다.”

마당에 모인 가신은 28명이 남았다. 모두 단정한 차림에 칼은 몰수당한 채 포로처럼 꿇어 앉아 있었는데 비장한 표정들이다. 그때 마루끝에 선 계백이 가신들을 내려다 보았다.

“이또 다다시가 4대째 내려온 영주라고 들었다. 맞느냐?”

맞다, 백제방 관원을 시켜 이또와 아리타, 마사시의 집안 내력과 성품, 가족, 주민들에 대한 통치 방법, 가신들의 성향까지 조사를 해온 것이다. 그동안 칠봉산성 성주를 지냈을 때부터 주민들을 다스려온 계백이다. 전투에서는 일시적으로 용장(勇將)이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지장(智將)이 패권을 잡는다는 사실을 깨우쳐 온 계백인 것이다. 덕(德)만 베풀어도 안되고 누르기만 해서도 안된다. 선정을 베푸는 것이 전쟁보다 어렵다고 했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이또 다다시는 제 조상의 덕분으로 영주를 이어 받았지만 백성들은 수십년동안 늘어나는 조세와 부역과 군역(軍役)에 시달리기만 했다. 이곳 영지는 곡식의 소출이 좋다면서 조세를 다른 곳보다 많이 가져가는 바람에 오히려 주민 수가 줄어들었다. 힘들어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계백의 목소리가 마당 밖으로도 퍼져나가 병사와 하인, 내성에 들어온 주민까지 담장에 붙어 귀를 기울였다.

“오늘자로 이또 다다시 가문은 끝났다. 너희들, 이또의 가신이었던 너희들에게 묻는다. 죽은 이또에게 충성하겠다는 자들은 영지를 내놓고 떠나라. 그러나 새영주인 나한테 충성하겠다는 자는 남아라. 내가 판단해서 결정을 할테다.”

그리고는 계백이 몸을 돌렸다. 화청과 윤진, 백용문이 뒤를 따른다. 저녁, 술시(8시)가 되었을때 청에서 화청과 술을 마시던 계백에게 하도리가 다가와 보고했다.

“주군, 이또의 중신 사다께가 왔습니다.”

사다께는 이또 다다시의 중신으로 5천석 영지를 떼어받고 집사 노릇을 해왔다. 나이는 55세, 사다께 또한 이또 가문의 대를 이은 가신이다. 곧 청 안으로 들어온 사다께가 두손을 바닥에 붙이더니 계백을 보았다. 주름진 얼굴,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제가 중신(重臣)으로 가신들을 대표해서 말씀 드립니다. 이또 다다시는 능력이 없고 사리사욕만 차리는 영주였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새 영주가 새시대를 열어야겠지요.”

사다께가 똑바로 계백을 보았다.

“제가 가신을 대표해서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