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완주군 봉동읍 신봉암리 고향마을을 잊은 적이 없다. 마을 뒤쪽으로 봉실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양쪽으로 활짝 편 매의 날개처럼 산줄기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 봉실메산 줄기가 동네를 보호한다고 한다. 정상의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농사철에 가뭄이 들면 동네어른들이 그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옥녀의 가랑이 사이로 오줌줄기 같은 물줄기가 가득 흐르기를 비는 것이다
마을 어귀에는 힘센 장사가 갖다 놓았다는 크고 검푸른 바위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동네를 수호하는 그 신성한 바위의 이름은 바우쟁이다. 신봉암리는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인 명당이라 그런지 시골의 자그마한 동네에서 면장이 셋이나 났고 출향한 여섯 명의 목회자가 활동을 하고 있다.
조그만 산동네지만 별일들이 많다. 연애당 솔밭이라고 하는 곳에서 겨울이면 몇 쌍의 부부가 탄생하곤 했으니 말이다. 결혼식장이 없어 마을 처녀들이 결혼식장을 꾸미곤 했다. 색종이테이프를 사다가 솜씨를 부려 사철나무에 꽃처럼 꽂아서 식장을 마련했다. 시골마을에서의 결혼식은 곧 마을의 축제며 잔치이고 놀이였다. 워낙 빈궁한 시절이라 혼례 집의 잔치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너나없이 잔치의 주인공처럼 즐거워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마을부녀회장을 5년이나 맡았다. 그때 우리마을은 120호로 이웃 간에 꽤 다정하게 지냈다. 동네 어른들은 마을길을 넓히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하느라 힘을 합쳤다. 가난의 배고픔을 눈물과 푸념을 섞어 나누며 서로 이해하고 살았다.
정월 초엿샛날엔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언젠가부터 연례행사로 치러졌다. 마을의 재앙을 막고 가정마다 복되고 기쁜 일을 축원하며 일년 농사의 풍년을 소원하는 기복행사였다. 당산제를 열기 전에는 어떠한 살생도 금하였으며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냉수욕을 했다. 그리고 고깔을 쓰고 풍물소리에 맞춰 얼쑤덜쑤 춤을 추며 시멘트종이에 돼지머리를 근사하게 그려 깃발처럼 매단 장대를 앞세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 할머니들은 고쟁이 허리춤을 양손으로 벌려 배뿔뚝이마냥 몸을 흔들흔들하며 춤을 추었다.
아저씨들은 얼굴에 숯검댕이칠을 하고 다리를 들썩거리며 돌아다녔다. 마을의 액을 몰아내는 몸짓이었다. 그 춤의 행렬은 옹달샘에서 시작하여 마을의 모정과 우물, 공동변소까지 두루 돌아 바우쟁이의 바위장승에게까지 제사를 지냈다. 남녀노소 어우러져 경건한 맘으로 비손을 하고 함께 나눠먹는 신성한 축제였다.
동네어른들이 비록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지만 착한 심성이 마을을 포근하고 그립게 만들었다. 해마다 새해는 오건만, 나는 추억으로 풍물을 치는 소리를 듣고 신명나게 춤을 춘다. 이미 귀천하신 어른들 .그분들은 생활의 고난과 고통을 신에게 맡기고 오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할 뿐으로 살았을 것이다. 개인욕심보다는 그야말로 이웃사촌과 동고동락하는 화합과 우애의 정신으로 살았던 것 같다. 비록 궁핍했지만 나눌 줄 알았던 사람들. 서로서로 챙겨주며 도왔던 사람들. 초가삼간이나 오두막집의 산골마을이 정말 그립다. 산자락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에 불현듯 친정나들이를 하고 싶다.
* 이숙자 수필가는 <지구문학> 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할동하고 있다. 수필집 <늦은 햇살이 아름답다> 가 있으며 현재는 시낭송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늦은> 지구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