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좌우로 산을 품고 흐른다. 그래서 큰 도시를 거느리지 않고 주로 비탈진 곳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여기 작업실이 있는 구미마을도 그렇다. 강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순창 무량산 자락에 고려 말부터 남원 양씨들이 터를 닦고 마을을 이루어 살아왔다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대숲으로 병풍 쳐있는 종가집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2002년에 우연한 인연으로 그 집 바로 옆에 둥지를 마련하게 됐다. 주인장이 널찍한 대갓집을 선뜻 내주었다. 강과 가까이 할 수 있어 작품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위치이다.
처음엔 도시에서 살아온 습성에 더해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돌담길 사이를 오가는 동네사람들과 눈 마주칠까 두려워 대청마루 끝에 발을 쳐놓고 지냈다.
앞집 할머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앞집 할머니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우물가에서 하루가 시작되나 보다. 나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강가로 나선다. 빠른 걸음으로 강물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바람이 가만히 이마를 건드린다.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바람의 감미로움은 가히 매혹적이다.
두루미도 미리 와 기다리고 있다. 집채 만 한 바위들 틈새로 흐르는 물소리가 봄을 독촉하는 역동적 메시지로 들린다. 바위 주변을 싸안고 있는 억새와 물버들에서도 새 생명들의 색조가 어른거린다. 강 건너 억새밭에서도 풋풋한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면서 술렁인다. 느슨함과 움츠림을 떨구게 한다. 어느 계절인들 눈에 벗어 날 리가 없지만 봄의 에너지만큼은 대단한 설렘이다. 이 강변길에 머무는 시간들이 무척 좋다. 흐르는 강과 함께하는 것들과 이야기하며 4km 남짓 상류로 걷다보면 바위들이 빼곡이 드러선 곳이 나타난다.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 설치한 작품들이다. 안개가 더해진 강가는 오롯이 고요함과 여유, 피안으로 이끈다.
오른쪽으로 무량산(590m)과 용골산(630m), 왼쪽으로 벌통산(440m)을 품고 있는 이 강변길과 20여년 함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