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사회에서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보는 더 소중하다. 기해년 새해를 맞아 전북일보가 연중기획으로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함께 해서 더 따뜻한 첫 번째 인물은 서정 목사다.
서정(68) 목사는 지난 26년간 ‘장애인 자활·자립’에 매달려 왔다. 장수 장계면 명덕리에 위치한 벧엘마을은 서정 목사의 평생 꿈이 응축된 곳이다. 이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가 없는 세계다.
“장애인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비정상인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1982년 사고로 휠체어와 한 몸이 된 그는 1986년 장애인 시설에 들어갔다. 당시 시설에서 근무·생활하면서 느낀 건 맹목적인 돌봄 형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누군가가 주는 밥을 먹고 잠들며 생을 이어가는 게 최선인지 안타까웠다”며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시설에서 만난 평생의 동반자 정명화(61)씨 등과 함께 1992년 2월 경기도 하남시에서 장애인들의 자활·자립·선교를 목표로 하는 ‘벧엘장애인농장’을 세웠다.
왜 농사와 농장이었을까?
“제가 가르쳐 줄 수 있었으니까요. 농민학교에서 강의했었을 만큼 농업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흙을 밟고 생명을 키우는 게 장애인들의 건강상에도, 정서상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발달장애인과 노숙인 27명은 서 목사가 빌린 2000여 평 밭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로 각종 채소를 심고 닭을 키웠다. 지원금 없이도 자급자족하거나 채소·달걀을 매장에 납품하며 먹고 살았다. 주변에서 장애인은 일할 수도 혼자 살 수도 없다고 했던 시절, 장애인들이 제손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벧엘장애인농장’은 1996년 장수로 터를 옮겼다. 하남시에 있던 농장이 가건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당한 탓이다. 임대가 아닌 자가소유의 땅이 있어야 흔들림 없는 터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서 목사는 2000년 11만 평 임야가 있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뿌리 내렸다. 토짓값은 전국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이동을 반복하면서 노숙인들과 가족이 있는 장애인들은 농장을 떠났고, 현재는 연고가 없는 발달 장애인 15명과 복지사·직원도 10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시설 규모도 제법 커져 ‘벧엘장애인의집’과 농장, 벧엘장애인의교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농장은 지난해부터 농사를 중단한 상태다. 다른 지역에서 장애인 노동력 착취 논란이 일어 굳이 오해받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서 목사는 “직원들이 주된 일을 하고 발달 장애인은 하루평균 2~4시간 자활과 재활의 목적으로 활동해 우리 농장은 문제가 없었지만 괜한 오해를 받기 싫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애인 자활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이 든 부모가 다 큰 장애인 자식 데리고 목숨 끊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부모가 나이 들어서 부양 능력은 떨어지는데 계속 자녀에 묶여 있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예산지원이 아니라 장애인도 자립하고, 장애인 가족도 부담을 더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애인 가족이 함께 살며 농사 짓고 농장을 운영하는 생활공동체 ‘벧엘마을’ 조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단체를 법인화했다.
“장애인 자활을 위해서는 가정이 살아나야 합니다. 시설에서 장애인이 일을 하면 노동력 착취라고 하니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짓는 겁니다. 자녀들은 부모님 일손을 돕다가 복지관에서 노는 거죠. 닭장에 달걀을 가지러 가면서 운동도 하고요. 가정 생계와 장애인 자녀의 복지·자활을 동시에 이루는 농촌 장애인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게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