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난무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닌, 세 ‘하얀’ 이야기를 오늘은 해보려 한다.
먼저 하얀 날, 화이트 데이 얘기다. 요사이 편의점, 슈퍼, 제과점을 지나칠라치면 인도 쪽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진열대 위 선물들이 유난히 눈에 띄곤 한다. 겉으론 무심한 척 하면서도 모두들 화이트 데이가 임박했음을 안다.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어깃장을 놓을 생각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니면서 이번에도 필자에게 꼰대 정신이 발동한다. 이 또한 일본인들의 상술이니 눈 부릅뜨자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질 젊은이들의 냉소가 두렵다는 게 또 꺼림칙하다.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아들 딸을 낳으면 참 좋은 일이다. 인구절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는 더욱 더 그렇다. 다만 하필 여기다 ‘화이트’라는 단어를 갖다 붙였는지 그게 개운치 않을 뿐이다. 차라리 ‘속삭임 날’이나 ‘고백의 날’ 정도로 명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렸을 때부터 ‘백의민족’에 인박여 살아 온 기성세대로서는 ‘순백의’, ‘결백한’, ‘정직한’이라는 느낌을 주는 화이트라는 단어가 이런 상술에 맥없이 소비되는 게 영 마뜩잖아서다.
두 번째는 옛날 이야기다. 긴 겨울 밤, 온 종일 얼음 지친 노곤함으로 눈꺼풀이 연신 내려 앉으면서도 이야기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듣던 얘기 중 하나다. 훈장님은 참으로 난감하였다. ‘저 고약한 녀석을 어떻게 혼내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도 다른 학동들은 큰 목소리로 천자문을 따라 읊고, 열심히 붓을 휘둘러대는데 유독 그 녀석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아닌가? 혼낼 요량으로 불러내어 ‘뭣 때문에 한나절을 꼬박 졸고 있냐’고 다그쳤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훈장님이 그토록 존경하시는 공자님을 뵙고 왔다’는 것이다. 뵀으면 바로 올 것이지 왜이리 늦었냐고 채근하자 점입가경이다. ‘훈장님처럼 그분도 훈화말씀을 하도 길게 하셔서…’로 응수한다. 학동의 대답을 좋게 보면 선의의 거짓말, 즉 화이트 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훈장님으로서는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따끔히 혼내줄 방도를 찾아내야만 한다.
오늘의 세 번째는 머리가 하얘지는 이야기다. 어느 목사님이 털어 놓은 고민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장로님 한 분이 꼭 딴지를 거는데, 그것도 신성한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경우다. 소외된 이웃 지원사업으로 관내 복지원 지원을 결정하고 그 지원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 불현듯 교회 내에서도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이미 확정된 복지원 대신 그 장로님과 친분인 있는 특정인을 지원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는 식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본인에게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듣고 있는 다른 분들은 머리가 하얘진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데 목사님이든 다른 장로님들이든 그분의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반박하기가 참 난처했으리라. 그렇다고 건건이 그분의 주장을 따르자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참 난감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 장로님을 말릴 방법은 없는 것일까? 천만에. 목사님은 조만간 훈장님의 이야기에서 묘안을 찾아낼 것이다.
훈장님은 그 이튿날도 동일한 레퍼토리로 거짓을 고하는 그 어린 학동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먼저 꿀밤을 제대로 한방 먹이시고는, 근엄하게 일갈하셨단다.
“떼끼, 이 녀석아!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좀 전에 공자님을 뵙고 왔는데, 최근에 널 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다음부터 공자님을 뵈러 갈 때는 꼭 미리 얘기하고 가거라. 아니면 나랑 같이 가든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찌 되었든 오늘은 화이트 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