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다. 도시나 농, 산촌 아니면 바닷가 그 어디에서든지 태어남과 자람이 있고 그 터전에 고향을 둔다. 고향의 속살은 그러한 터전에 이웃사촌하며 공동체의 삶을 들인 마을살이에 들어 있다.
마을은 사람살이의 현실적인 유토피아 공동체이다. 이웃사촌의 모둠이 모여 가장 생태적이고 인문사회적인 환경을 진화의 에너지로 삼으며 수 백 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렇다.
나는 지리산 농촌들의 마을들을 수십 년 동안 조사해왔다. 마을 속에 들어 있던 음식과 씨족이며 풍수와 생활문화 같은 것이 그것들이었다. 그 이야기 중 마을의 탄생 신화를 꺼내보고자 한다.
지리산의 마을들은 대부분 자연의 일부에 들어있고 마을 탄생의 이야기는 구전에 있다.
조선시대 전란이나 사화 같은 사회적 불안을 피해 새로운 삶터를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지리산 산중을 찾아들었다. 여기저기 다니던 한 사람이 사람살기 좋을만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노숙을 하며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비가 개이자 주변 곳곳에 불을 피웠다.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 연기가 여러 갈래로 구불구불 산 계곡을 타고 올라갔다. 훗날 그 연기 길은 마을의 골목이 되었다. 풍수의 바람 길을 사람살이의 터전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노숙하던 주변에서 가장 습한 곳을 찾아 땅을 팠다. 물이 고였고 조금 지나 개구리며 소금쟁이 같은 미물들이 찾아들었다. 살아있는 물이 확인되었으니 풍수의 우물을 사람살이의 터전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바람과 물길을 알아냈으니 이번에는 주변에서 가장 큰 나무를 찾아갔다. 뿌리며 가지의 방향과 상처 등을 살펴서 태풍이며 가뭄이며 자연재해의 정보를 그 나무에서 얻고 그 댓가로 제를 올리며 당산나무로 섬겼다. 이만한 곳이면 일가친척을 불러 마을을 이루어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내고 그 터전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으니 마을은 그렇게 생겨났다.
조상에게 새로운 터전의 마을 정착을 알리는 일 또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씨 간장을 집안의 가장 좋은 자리에 모셔두고 조상이 계신 곳을 향해 두 손 모아 고했다. 그 일들이 모두 끝나면 돼지를 들여 사람살이의 터를 지신에게 고했고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집안에 들이게 되었다.
마을은 그렇게 수풍청(水風廳)삼합을 보듬으며 그것을 자양분 삼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자란다는 선조들의 생각은 마을의 정체성이다.
마을은 대부분 씨족집단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인 종가는 마을 공동체의 뿌리인 규범적 존재였다. 종가는 마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했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어디일까? 수풍청(水風聽)의 삼합이 일 년 내내 집안에 존재하는 곳이었다. 우물과 바람과 자연의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이 종가의 집터가 되었다. 우물은 종가의 씨 간장 종자가 되었고, 흔들바람은 일 년 내내 새 기운을 불러 집터의 지기를 지켜내어 건강한 종손을 길러냈다. 그리고 사계절의 자연이 내는 소리 또한 사람을 소우주체로 단단하게 해주는 집안의 버팀목이 되게 했다.
사람들은 종가의 양택(陽宅)을 중심으로 집터를 골라 자리하며 마을을 이루었고 지금 우리는 그 후손들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대가로 풍성한 삶 속에 들었다하나 항상 갈구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아직 미완의 행복이다. 물과 바람과 자연의 소리를 보듬은 고향에서 그 에너지를 들여 보자. 마을은 마음에 크게 두어야 할 삶의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