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되지 않는 권력의 위기

이강만 한화그룹 부사장

필자의 지난 달 칼럼 ’화이트, 화이트, 화이트’를 흥미롭게 읽었다면서, 독자 한 분이 ‘이야기를 살짝 좀 비틀어서 학동이나 장로님이 아니라 훈장님이나 목사님이 동일한 문제를 일으켰다면 어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땠을까?

학동들은 참으로 난감하였다. ‘저 훈장님을 어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도 학동들은 한 글자라도 더 배우려고 천자문을 반복해 읊조리고 있는데 훈장은 보료 위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장단 맞추듯 고개를 상하로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눈을 뜨고는 “왜 큰소리로 천자문을 외지 않느냐?”며 호통을 치시더니 이제는 아예 장침에 비스듬히 기대시는 게 아닌가? 얼마나 분하고 답답했던지 어느 겁 없는 학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훈장님, 저희가 ‘하늘천’에서 ‘거칠황’까지를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합니까? 며칠째 그리 눈감고 계시는데 주무시려면 댁에 가서 주무시지요!”라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고함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훈장은 일순 당황한 기색이 만연했지만 곧 평정을 찾고 태연하게 대답하신다. “성리학의 대가이신 이황 선생님을 잠시 뵙고 왔다” 학동들이 수군대며 “한번 다녀오시면 될 것이지 왜 그리 며칠씩이나 오가시느냐?”고 합창하듯 항변하자 대답이 또한 기가 차다. “퇴계 선생께서 아이들 공부는 스스로 하게 하고 수시로 서로 만나 거대담론을 나누자 하시니 낸들 어찌 하랴”

제자로서, 스승이 아무리 도를 넘는 일탈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지적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직접 접근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기가 애당초 불가능한 대학자 끌어들이면서 사실을 호도할 경우, 학동으로서는 달리 대응할 방도가 없다. “제가 잠시 꿈에서 퇴계 선생을 만나 확인했는데 훈장님은 아예 오신 적도 없다고 하던데요”라며 학동이 위트로 되받아 친다 한들 재치 있다는 말은 듣겠지만 학동의 말에 권위가 생기지는 않는다. 설령 끌어들이는 대상이 쉽게 접근 가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그분이 훈장님과 특수관계일 경우 역시 진실은 드러나기 어렵다.

비단 배움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지역공동체에서도, 종교계에서도, 경제활동의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정치집단이나 권력기관 내에서 하위자가 상급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스스로 불이익을 감수하려고 마음 먹지 않는 한 그냥 혼자 감내할 일이지 선뜻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일단 말을 꺼내는 순간, 아무리 합리적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그 입증책임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주장만 난무하고 실체적 진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게 다반사인 그쪽 세계에서는 더 그렇다. 혹여 상대가 일말의 양심은 남은 상급자여서 ‘행위는 밉지만 너를 용서하겠노라’며 감싸 안아준다 한들 종국에 서로에게 남는 앙금마저 해결해줄 수는 없다. 공익제보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모든 것에 눈을 감아 버리자. 아니면 그 골치 아픈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게 내버려두자’며 문제에 비켜서거나 아예 외면해 버리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말이다. 조직의 위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소통은 사라지고, 쌍방향 소통이 없어진 자리에 일방적 지시와 무조건적인 복명복창이 남을 뿐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견제되지 않은 일탈이 힘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에 부조리가 만연케 되고, 결국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상호간의 불신이 조직을 무너뜨리고 만다.

오늘 조용히 생각해 본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필자는 혹시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뿔난 학동? 당황한 훈장? 어리둥절 퇴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