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1. 이치백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 “전북인 긍지 잃지 않고 과감히 자립하려는 마음가짐과 행동 뒤따라야”

시대정신 제대로 읽어야만 도민 밝은 미래 가능
언론인 생활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실현한게 가장 기억에 남아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이 전북의 과거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흔히 나이 70을 일컬어 고희(古稀)라고 한다. 사람은 예로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100세 시대인 요즘엔 70년의 세월이 적게 느껴질지 몰라도 70개 성상은 결코 짧지 않다.

하물며 일제 식민통치와 뒤이은 남북분단및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속에서 70이란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숱한 사건과 사고가 빈발했고, 수없이 많은 인물이 명멸해간 세월이 아니던가.

올해 창간 69주년을 맞은 전북일보는 내년 6월이면 창간 70주년이 된다. 이에 본보는 매달 한번씩 도내 각계 인사를 만나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향후 전북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첫번째는 반세기 가까이 언론에 몸담아 온 이치백(90)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백세시대여서 그런지 아직은 건강합니다(웃음). 16년간 맡고있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직을 최근에 후배에게 넘겼습니다. (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는 도내 일원의 각종 향토 문화를 조사하고 연구해서 지역문화 발전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는데 어쨋든 긴 세월동안 나름대로 전북과 전북민을 위해 하나의 돌탑은 쌓았다고 자부합니다. 또 7월에 유네스코에서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만, 무성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사실 제가 15년간 무성서원 원장을 맡아왔는데 오랫동안 노력해서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전라도 정도 1000년을 맞아 ‘전북몫 찾기’가 화두였구요, 요즘에도 지역사회에서 전북이 과연 어떻게 좌표를 정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합니다. 그런점에서 오늘날 전북의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고 밝은 미래를 설계하려면 반드시 지난 역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빌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전북인이여, 필요할땐 반드시 목소리를 내고 늘 도민으로서 긍지를 잃지말자’고 말입니다. 90개 성상을 살아오면서 느낀건데요, 지역민들이 좀 오기도 있고 집요한 구석이 있어야만 대우받습니다. 바로 이웃한 전남이나 광주와는 늘 형제처럼 잘 지내야 하지만, 전북이 전남·광주의 한 속주처럼 가볍게 취급돼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권리위에 잠자는 자가 보호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방화 시대에 지역민들이 통일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을 때 과연 누가 그 지역을 살피겠습니까.”

△그 연장선상의 얘기입니다만, 한때 ‘전북홀로서기’란 말이 있었지요

“맞습니다. 3김시대가 한창 기승을 부릴때 저는 전북홀로서기를 주창했습니다. 전북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소석(이철승)이 양김과의 대결에서 패한이후 정치적으로 전북은 급격히 전남·광주권에 편입돼 버립니다. 따라서 전북홀로서기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었는데요, 민주대 반민주 구도하에서 자칫 적전분열이 되면 안된다는 여론 때문에 사그라들었지요. 그런데 잘 보세요. 전북몫은 다른 사람에 의해 그냥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

△많은 이들은 전북이 과거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갈게 있어요. 과거 경상도는 가난해서 풍족한 전라도 지역에 머슴살이와서 겨우 먹고 살았는데 잇따른 산업화 과정에서 전라도가 소외되면서 역전됐고, 오늘날 전북은 소외의 대명사가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큰 틀에서보면 오랫동안 야당의 길을 걸으며 아웃사이더였던 전북은 늘 관직에서 소외되면서 경상도보다 크게 뒤쳐졌던게 사실입니다. 쌀 위주의 농경사회때 호남에 큰 부자가 많았지만, 경상도 역시 큰 부자가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또 광복이후 일본 유학생중 전라도보다 영남인들이 훨씬 많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 이후에는 두말할 것도 없구요. 한국 100대 기업 오너중 전북 출신이 얼마나 되며,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에 전북인이 몇이나 됩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때 전북 인사들이 반짝 등용됐고,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크고작은 자리에 도내 인사들의 기용폭이 제법 늘어나면서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지 않습니까.

“무장관·무차관 시절과 비교하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현 정부가 출범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북 출신 인사중 많은 이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고 몇 안됩니다. 전북 인사가 등용되면서 금방 세상이 뒤바뀔것으로 도민들은 기대했는데, 고관현직에 발탁된 사람들은 개인의 복지는 달성했는지 몰라도 도민들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진게 현실입니다. 굳이 군산경제가 폭망한 일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북도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있다는 것은 곧 전북이 주는 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분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현 단계에서 지역 지도자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하나의 일화를 말씀드릴까요. 1968년 4월 23일자 전북일보 신문 1면에 커다란 호소문 하나가 실렸습니다. 박용상 사장과 진기풍 편집국장 시절인데 당시 저는 부국장겸 정치부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며칠간 밤새워 준비했습니다. 대략 5개 사항인데 전북인의 과감한 등용, 전군도로 확포장, 향토은행 설립, 호남야산개발 추진, 원광대 종합대 승격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5개 사항은 거의 다 실현됐는데요, 제가 언론인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삼양사 전주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이환의 지사, 은병근 전주시장이 수당(김연수)을 찾아가 읍소한 것을 잘 모를 겁니다. 군산 입주가 기대됐던 LG화학이 구미로 방향을 틀고, 자사고인 상산고를 없애려고 하는 지역 풍토가 개선되지 않으면 전북에 미래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늙은 낙타를 따르라”는 아랍 속담처럼 시대가 변했지만 지도자들이 더 겸허한 자세로 원로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몸을 불살라야 합니다.‘용두사미’로 끝내는 풍토를 없애지 못하면 전북엔 미래가 없습니다. 도민과 지역 지도자 모두에게 하고싶은 말입니다. 아직도 전북엔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단합하지 못하고 전북인의 긍지를 갖지 못하면 우리가 후배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기업체가 됐든 뭐가됐든‘전북’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을 도민 스스로 작고 부끄럽게 여긴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제대로 알아주겠습니까. 좀 부족해보여도 지역사회의 인재 키우기도 더 배가돼야 합니다.”

이치백 회장은

평생 언론인임을 자부하는 이치백 회장은 1929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 해성초, 이리공고, 원광대를 거쳤다. 도내 언론인중 최초로 성곡언론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동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25세때 연합신문 기자로 출발, 얼마후 전북일보로 옮겨 편집국장, 주필 등을 지내며 필력을 과시했다. 이후 전라일보 초대 사장을 거친뒤 일선에서 은퇴,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으로 활동했다. 서울분실장을 3년간 지내기도 한 그는 지역 언론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관훈클럽 감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 등도 지냈다.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파노라마처럼 설파하는 그는 이 시대 최고 원로중 한명으로 꼽힌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