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나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를 맡은 이래 바쁘게 지내오며 간간이 틈이 날 때면 ‘한 분’을 찾아보곤 했다. 18년 전인 2001년 개관을 앞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의 예술감독을 맡아 밤새워 일을 해도 -그 덕분에 9월 11일 새벽, 잠을 쫓으려고 켜 놓았던 TV에서 뉴욕 무역센터가 재난영화의 한 장면같이 무너지는 현장을 전율 속에 지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손으로는 끊임없이 일을 하며- 시간이 부족하던 때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이셨다. 어린 딸아이와 사내아이를 둔 어머니셨는데 개관 초창기 홍보와 관객 모으기에 당신의 일처럼 참여하셨고, 극장예절 정착에도 솔선수범 하셨으며, 자녀들 또한 적극 참여시켜 당시 ‘오즈의 마법사’ 공연에 동물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고마워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아이들에게 문화가 무엇인지 어려서부터 알게 하고, 본인도 문화활동에 참여한다는 즐거움 때문이라 하셨다.
개관 후에 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게 되었고, 그후 늘 이분께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부담을 느껴왔다. 그래서 부임 후 나는 우리전당의 회원명부도 들여다보고, 개관 때부터 근무 중인 직원들에게도 물어보고 했지만 어디서도 그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3월 12일 오후 2시 11분.
우리직원이 “외부에서 온 전화인데 대표님을 찾는다”고 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니 “맞아, 목소릴 들으니 서현석 감독님이 맞네요. 저 ㅇㅇㅇ예요, 감독님.” 순간 나도 알았다. 바로 내가 찾던 분이라는 걸.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씀에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서현석? 혹시나 동명이인인가? 확인하고자 전화를 하셨다니 잊지를 않고 계셨음에 가슴이 잠에서 깨어나듯 뭉클 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분과 나는 서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등등 얘기 끝에 내가 “아이들도 많이 컸겠네요” 하니 웃으시며 “딸아이는 시집을 갔고 아들은 대학 졸업반이에요.”라고 하셨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그저 똘망똘망 아이들로 남아 있었던 거였다. 나도 올 9월이면 할아버지가 된다는 등 신변얘기가 이어졌고, 빠른 시일 내에 뵙기로 하고 나의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다. 그 때가 오후 2시20분경 이었다~ 반가움을 가라앉히고 업무 중인데 4시가 조금 넘었을까, 웬 아저씨가 내 사무실로 들어 오길래 손님이신가보다 했더니 꽃배달을 왔다며 수령증에 싸인을 하라셨다. 싸인을 하며 “1월에 축하 꽃은 거의 받았는데 누구지?” 하며 예쁜 카드가 있어 열어보니 바로 ‘ㅇㅇㅇ 어머님’께서 보내신 꽃바구니가 아닌가! 아마도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보내셨나 보다. 이렇게나 큰 감격은 내 아내가 드디어 결혼해주겠다고 한 순간 이후 처음이었다.18년 동안을 잊지 않고 나에 대해 궁금해 하고 찾으셨다니, 이런 대접을 언제 또 받을 것인가!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또 한 번 울컥. 나에게 전당을 떠나 있던 18년은 안타깝지만 잊어야 하는 아릿한 추억의 편린이 아니라 숙성의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깨닫도록 자긍심을 북돋아주신 고마운 ‘그분’께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년 개관 20년을 맞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은 예향 전북의 자랑이요 도민의 삶 속에 한부분이 되도록 더욱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ㅇㅇㅇ어머님’ 같은 도민 여러분의 성원과 참여가 더해지면 금상첨화가 될 것입니다!
도민 여러분의 행복과 번창을 기원합니다.
/서현석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