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용지면 와룡리에 가면 용이 누워있다는 의미의 와룡산이 있는데 마을 한쪽엔 십수년전 ‘바람의 파이터’란 영화로 유명세를 탔던 극진 가라데 창시자 최영의(1923~1994) 생가 터가 있다. 식민지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주먹과 맨몸뚱이 하나로 일본 격투기계를 정복한 사람이다.
김제 용지에서 태어난 최영의는 16살에 홀로 일본에 건너가 극진회라는 가라테 유파를 창시한 격투기의 대가였다.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널리 이름을 알린 그는 1950년 맨손으로 소와 대결해 47마리를 쓰러뜨렸는데 이중 4마리는 즉사했다고 한다. 그의 일대기는 만화가 고우영의 ‘대야망’과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로 널리 알려졌다. 2004년‘바람의 파이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 인기를 누렸다.
지역사회에서는 최영의라는 본명으로 각인돼 있는데 일본에서 오래 살면서도 한민족의 혼을 잊지않기 위해 최배달 이란 이름으로도 행세했다. 최영의는 면장을 지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 비교적 부유했으나 어려서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주먹이나 손날로 상대를 가격하는 수박(手搏)·당수(當手)에 일가견을 갖게된 그는 맨손으로 소와 대결하여 뿔을 부러뜨리고, 한방에 죽이는 등 가공할 능력을 과시하면서 일본 열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무릎을 꿇으면서 트라우마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은 최배달을 보면서 열광했다. 전 세계 140개국에 가라테 지부를 두었으나 한국에는 태권도 발전을 위해 설치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사후 4반세기가 지나면서 김제에서는 최영의를 관광마케팅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읍시가 최치원 마케팅을 통해 무성서원·피향정을 널리 알리듯 각 시군은 역사인물을 활용해 관광 상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 가라테는 2018년 기준 전세계 130여국에서 약2500만 명의 수련생이 있다고 하니 이를 활용한 지역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보는것도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요즘 일본이 한국의 강제징용 대법원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경제보복 조치에 나서면서 한일 관계가 일촉즉발이다. 이번 사안의 발단은 멀리 김-오히라 메모에서 비롯됐다. 김종필ㆍ오히라(大平) 회담에서 비밀메모(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일청구권문제 등에서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합의를 해준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친다. 대일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이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한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최영의가 되살아난다면 한국이나 일본에서 당수를 한대씩 맞아야 할 사람이 많이있다. 나이 어린 베트남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한 이를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