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등재 정읍 무성서원, 관심 높아져

정읍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선비정신이 축적되어 온 문화적 전통과 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무성서원은 1615년 서원으로 출발했다.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숙종 22년인 1696년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으로 개칭됐다.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 속에도 살아남았던 전라북도 유일의 서원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47개의 서원만 남았는데 전라도에서는 무성서원과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만 헐리지 않았다.

무성서원 사당 한가운데에는 고운 최치원(857년~?)의 위패와 초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는 신라 말 태산(지금의 태인, 칠보 일대)의 태수를 지냈다.

무성서원은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생사당(백성들이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기 위하여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사지내는 사당)인 태산사가 뿌리다.

고운이 태산군의 태수로 부임한 886년경부터 계산하면 1100여 년의 역사이다.

무성서원은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한 다른 서원과 달리 마을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신분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했고, 지역민 결집의 중심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조선 초의 문인 불우헌 정극인(1401~1481,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불우헌은 1436년 벼슬에서 물러나 처향(妻鄕)인 태인(그의 묘소와 유적이 현재 칠보면에 소재)에 내려와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은 자연 속에 묻혀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면서 자연 속에서의 삶을 노래했다. 그는 특히 성리학적 질서를 담은 지역자치 규약인 고현동향약(1475, 보물 1181호)을 통해 미풍양속을 권장하고 이웃과의 화목을 권장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일제 강점기인 1906년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병오창의가 일어났다.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이 주도한 이 사건은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으로 평가된다. 특히 전북지역 중심서원이자 정신사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무성서원은 폐쇄적이지 않은 건축물이 간결하고 모든 건축물의 높이가 동일하며 마을을 항해 열린 공간으로 구성돼 서원 영역 전체를 관통한다고 평가 받는다.

또한 배향 인물도 많다. 고운과 불우헌, 서원 인근에서 활동하던 영천 신잠(1491~1554)과 눌암 송세림(1479~1519), 묵재 정언충(1491~1557), 성재 김약묵(1500~1558), 명천 김권(1549~1622) 모두 일곱이다.

이와 관련 정읍시는 무성서원 인근 4만 2492㎡ 부지에 호남 선비정신 수련과 풍류문화 계승 발전을 위한 무성서원선비문화수련원 건립을 추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