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디자인의 시작은 산업화와 그 태생을 함께 한다.
18세기 기술 혁신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일으킨 영국의 산업혁명 직후 순수미술이 가진 고유의 심미적 요소들을 분석활용하여 대량생산과 기능주의 등이 함몰된 기계 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19세기 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에서 잘 드러난다. 기계, 기술에 의한 대량생산품이 외형적 예술성이 결여된 채 마구 생산되는 현실을 부정하고, 중세 이후 수공예품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회복시키자는 취지의 문화반성운동으로써 근대적 조형 이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미술이 가진 심미성이 미술품으로써 내적, 정신적 가치를 벗어나 일상제품으로의 접목을 통한 외적, 효율적, 경제적 가치로써 그 역할을 확대하면서 수요자는 소유욕을 부담없이 해결할 수 있고, 생산자는 걸맞는 경제적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오늘날 디자인이란 현대 산업사회 속에 대량생산된 다양한 상품들을 각각의 아이덴티티로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미적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통하여 제품과 기업이 가진 마케팅을 포함한 무형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시장경제와 지속저긍로 소통하는 탈장르 예술 분야로 성장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디자인의 사회적 지위 상승만큼 과연 디자이너들의 직업적 지위는 성장하고 있을까
필자는 지난 10여년 간 다양한 지역 디자인 실무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초라한 예술가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필자 이전의 선배 세대들은 그 느낌이 더했을 것이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타 학문과 별반 다르지 않는 전문학사, 학사, 석사, 박사 등의 시스템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디자인은 단순한 도구적 수단으로 머물러 있다.
“시안을 먼저 받아볼 수 있을까요? 지난 업체는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실무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부 업체들의 생존 노력은 스스로 덫을 만들어 또다른 불합리함을 낳았다. 이는 산업 시대의 아이콘인 디자인이 결국 산업화 즉, 자본주의에서 철저히 외면받는 상황으로 변질되었다.
얼마전 지역 모 센터의 무리한 업무요청을 받았다. 지나친 일정과 데이터 부족 등 많은 난제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그들의 상황을 거절할 수가 없어 업무는 진행되었다. 일주일 간의 주말과 퇴근없는 디자인 격무와 함께 반복 수정 및 협의를 거쳐, 마무리 인쇄작업 준비로 지쳐갈 쯤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일정은 다시 감안할테니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추가진행해주세요. 죄송하게도 윗분이 주말에 어디선가 본 책자 디자인이 맘에 드셨나 봅니다.”
지난 일주일 간의 시간이 무참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필자는 불합리함을 이유로 해당 업무를 중단시키고 말았다. 그들 눈에는 디자인이 얼마나 초라하고 옹색한 도구적 행위였을까.
또한 본질적인 갑질을 죄의식 없이 범하는 그들이 대중 속에서 평등과 갑질 철폐라는 공공연한 외침을 하고 있다는 점, 그 이중성에 소름이 돋는다.
디자인은 산업 시대의 산물로,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다. 그들에게 시간은 돈이고, 그들에게 시안은 시간이며 돈이다.
즉, 디자인이란, 디자이너의 함축된 시간의 산물인 것이다. 누구도 의사에게 수술 이후 결과를 볼모로 비용지급을 논하지는 않는다.
그게 상식이니까.
/박세진 디자인에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