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내 예원당에서 창극 ‘지리산’ 공연이 펼쳐졌다.
대본 사성구, 연출 류기형, 작곡 황호준, 안무 김유미, 조명 최형오 등 국내 최정상의 제작진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던 이번 공연은 3일간 매 회차 매진을 기록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국립민속국악원을 이끄는 왕기석 원장은 “남원이라는 먼 곳까지 발길을 해주신 관객분들과 성원을 보내주신 분들이 있어 이번 작품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번 작품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기획된 만큼 의미있게 마무리 된 것 같아 감사하다”고 20일 지난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대본을 쓰는 과정에서 모두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바람에 연습 시간이 부족했고, 자연히 공연 일정이 미뤄졌다. 원래 7월 중 전주 한국소리문화전당에서 첫선을 보이려고 했으나, 일정이 미뤄진 탓에 무산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준비한 기간은 2개월 남짓. 그마저도 중간에 안무자가 바뀌면서 연습과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제작진과 단원들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첫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몰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창극 ‘지리산’의 무대는 가난과 절제를 미덕으로 알고 사는 지리산 속의 오래된 마을 ‘와운’이다. 이 마을 공동체의 일상은 부족하지만 함께 나누며 풍성하게 이어진다. ‘지리산’은 세상의 갈등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그려졌다. 노고할매, 길상, 반야 등 주인공 모두 지리산 봉우리 이름을 땄다. 강제징용,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의 발길이 이 평화를 짓밟아도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은 어찌 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최근 한일관계와 맞물려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극을 관람한 관람객 대다수가 “가슴 먹먹했다”는 반응을 내놓았다는 것.
“많은 분들에게 우리의 지난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근현대사 속 아픔을 되새기고 역사적인 현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작품을 보고 난 후 여운이 남은 거죠.”
이 주제는 ‘현재 진행중’이다. 지난 역사의 아픔을 되돌아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고 ‘함께 하는 삶’을 만들어가자는 염원이 담겼다.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왕기석 원장은 이번 작품에 담긴 가치 중 가장 핵심으로 ‘공동체의 삶’을 꼽았다. 사람의 생명은 존귀하다는 세계 만국의 가치를 가장 앞에 세운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주의의 침탈과 패망, 그리고 새로운 미 제국주의의 등장과 여순사건 등 격동의 역사를 이루는 사건들이 다소 밋밋하게 그려졌다는 평도 나온다.
이에 대해 왕기석 원장은 “제작과정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면서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에게 그 아픈 역사를 알도록 강요하게 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남북분단과 전쟁 과정은 생략되고 해방 이후 갈등으로 인한 좌우익의 대립을 곧바로 다루다보니 극이 두루뭉술하게 전개됐다는 평가도 쏟아졌다.
반면에 빨치산 토벌대, 친일 작가 등 실제 인물을 살려 등장시키도 했는데 일부 관람객들은 이를 두고 “역사적 사실을 너무 세게 다룬 게 아니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왕 원장은 “보는 이들마다 다를 수 있기에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되 다소 순화시켜 담으려고 했다”면서 “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 시작한 작품인 만큼 다양한 평가를 수용해 극을 재정비하는 과정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신, 그야말로 방대한 주제를 품은 지리산을 주제로 한 창극을 올리는 만큼 국립기관으로서 책임감도 컸다. 하지만 ‘창극의 새로운 변화’라는 국립민속국악원의 과제는 여전히 남았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왕기석 원장은 “옛것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야 한다”면서 ‘온고이지신’을 강조했다. 이어 “창극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장르”라면서 “예술은 시대성을 담고 있어야 하고, 그 흐름에 맞는 새로운 공연작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국립민속국악원은 이 같은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 오는 10월 ‘창극축제’를 연다. 국악 관련 국립단체에 대한 섭외를 거의 마무리했다. 한달간 국립민속국악원에서 10여 편의 작품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축제기간 창극의 방향성을 주제로 한 포럼도 열 계획이다.
창극 ‘지리산’ 초연을 마친 현 시점에서 국립민속국악원의 정체성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왕기석 원장은 “민속음악을 중심으로 하되 많은 이들이 전통에 관심을 갖고 찾아올 수 있도록 ‘접촉’하는 예술을 만들어가겠다”고 답했다.
오는 23~24일에는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교류공연으로 창극 ‘지리산’을 다시 한 번 공연한다. 이 공연을 끝으로 이 작품은 재정비를 위한 점검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영원한 끝은 아니다.
왕기석 원장은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다듬어가면서 레퍼토리를 쓸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이를 위해 제작진과 단원들이 공연을 만들면서 느꼈던 점과 외부의 평가를 귀담아 듣고 더 성숙해진 작품으로 관객들께 다시 인사드릴 것”이라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