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덕 시인의 ‘감성 터치’] 맛있게 맵겠다

아파트 마당에서 고추가 말라간다. 맨드라미 꽃보다 더 붉다. 한 소쿠리나 될까? 채반과 피서용 매트 위에 널린 고추, 옥상의 스티로폼 상자나 골목 공터나 댓 평 주말농장에서 키워냈으리라. 주차장 한쪽에 참 손때 맵게 널려 있다.

엉덩이 비집고 들어앉을 만큼의 땅만 보이면 푸성가리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담벼락 밑이나 길가에 꽃보다 먼저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를 피우는 건, 마음 깊숙이 새겨진 농경의 유전자 때문이리라. 고향의 부모님께 철 따라 쌀이며 양파 감자 마늘 참깨 고추를 바리바리 받아먹은 몸속 기억 때문이리라. 봄이면 두어 발 이랑에 씨를 심고 모종을 내는 사람들, 행여 잊어먹을세라 손발에 흙냄새를 바르는 것이다. 잡초에 묻힐세라, 가물세라, 진딧물 꼬일세라 푸성가리보다 먼저 푸르러가는 것이다.

눅눅한 가을장마도 말려버리는 태양초가 맵다. 매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고개 들어 아득한 하늘을 본다. 지금은 가고 없는 얼굴이 어른, 어른거린다. 저 바지런하고 손때 매운 이웃 덕분에, 올겨울 맛있게 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