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소설가 - 서철원 인문소설 ‘혼,백’

참다운 글은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

정조는 개혁 군주였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까지 그의 개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개혁을 견인할 전진기지로 규장각을 설립했다. 그리고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는데 바로 서얼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서철원의 인문소설 <혼,백> 은 글을 사랑했던 정조와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규장각 학자들의 이야기다. 정조의 개혁 정책은 벽파와 노론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작가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칼은 감추어지고 분노는 숨겨진다. 다만 ‘바람이 동에서 서로 불고, 멀리에서 새들이 울고, 전각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린다.’(151쪽) 붕당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죽음은 필연이고, 삶은 우연이다. 작가는 죽이고 살리는 정쟁(政爭)의 본질이 다름 아닌 문체라고 보았다. 청나라의 문장을 잡문이라 규정한 정조는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정조는 말한다. ‘노론은 조선을 삼킬 식민사관의 핵이다.’(129쪽) 이서구는 임금의 교서를 규장각지 서문에 새긴다. ‘글과 문장은 번다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야 하고, 수식할 때 거짓이 없어야 하며, 문체는 빼어나야 한다.’(131쪽) 정조의 서문은 능동적이었으나 숙고할 문제가 많았다. 그의 문체는 의고였고 ‘성리학의 무늬와 결이 완강했다.’(249쪽) ‘이서구는 문체와 전통으로 이어온 조선의 인문을 염려했다.’(134쪽)

그러나 변화의 흐름에 개혁적인 문체로 화답한 이들이 있었다. 허균은 <홍길동전> 으로 사대의 문체를 꺾고자 했고, 연암은 <열하일기> 로 탈식민의 문체를 획득한다. 정조는 허균과 연암의 글을 용납하지 않는다. 임금의 고뇌를 지켜본 유득공은 조선의 문장으로 발해를 일으키고, 왕은 그의 노력을 치하한다. ‘엄동에 불어온 <발해고> 하나가 언젠가 조선의 문장을 일으킬 것이다. 검서관의 문장이 곧 칼이다.’(270쪽) 나랏글을 세우고자 했던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 북학파와 18년간 유배지에서 쌓아 올린 정약용의 문장은 이제 ‘국문의 탑을 쌓는 훈민정음’(225쪽)이 되어 우리 앞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박제가는 문집 명농초고(明農初稿)에 ‘참다운 시(詩)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고 썼다. 서철원 작가의 <혼,백> 은 정조시대의 문체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사문학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범람하는 서사의 홍수 속에서 문체의 미학을 다루는 소설과 시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듯 문장을 쓴다’고 고백했다. 낙숫물이 댓돌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까닭은 반복과 집중이다. 흔히들 문체를 작가의 지문이라고 한다. 지문은 각자 다르다지만 그 다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각고의 노력 없이 자기 문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홀로 돌올하니, 그가 보낸 시간의 궤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철원 작가가 올해 제9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갑고 기쁘다. 한편, 그의 우아한 문장을 많은 독자들과 공유하게 되었으니 혼자만의 기쁨을 내어주는 쓸쓸함도 있다. 쓸쓸한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소설 속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쓸쓸한 날, 붓과 종이를 들고 벼루의 연안으로 나갈 것이었다.(167쪽)

* 황보윤 소설가는 2006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2009년 대전일보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창작집으로 <로키의 거짓말> 과 <모니카, 모니카> 가 있다. 현재 남원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