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나이 망구(望九·81세)를 넘기고 보니 내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자신은 나이먹은 것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지만 자식들은 금방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늙은 부모의 부자연스런 행동거지다. 하루가 다르게 말은 어눌해지고 시력도 저하되며 무엇보다도 뒤뚱거리는 발걸음 자세가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도 예외가 아닌지라 이를 간파한 딸녀석이 멋스럽고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스테인레스 지팡이 두 개를 선물로 주며 나들이할 때마다 이용하라는 게 아닌가! 할멈과 나는 아직도 마음은 이제 겨우 환갑, 진갑 넘긴 초늙은이일 뿐인데 지팡이를 짚는다 생각하니 남의 시선도 의식되고 다소 자존심도 상해 그냥 신발장 속에 처박아 두었다.
흘러가는 세월은 천하장사도 막을 수 없고 한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온 사람도 늙어서 찾아오는 병은 어찌할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다 삶을 마감한다. 세계 제2차대전의 영웅인 영국 처칠도 지팡이를 짚고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하니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웅호걸도 말년에는 지팡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노인네의 필수 반려품이라 할 수 있는 지팡이는 결코 부끄러운 물건이 아니고 인생을 살아낸 자에게 주어진 훈장과도 같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장수노인에게 명아줏대로 만든 청려장(靑藜杖) 지팡이를 임금이 하사했다고 한다. 청려장은 중국 후한 때 유향이란 선비가 어두운 방에 노인이 나타나 마른 명아줏대로 바닥을 탁 치자 푸른 불빛이 나며 주위가 환하게 밝혀졌다 한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도 50세가 되면 자식들이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려장을 바쳤으니 이를 가장(家杖)이라 하였고, 60세 회갑이 되면 마을사람 전체 이름으로 마련해 주며 축수를 빌었던 청려장을 향장(鄕杖)이라 하였다. 70세 고희가 되면 나라에서 내리는 청려장을 국장(國杖)이라 하였고, 80세 산수에는 임금이 친히 청려장을 하사하고 크게 잔치까지 베풀었다 하니 이 지팡이가 바로 조장(朝杖)이다.
오늘날에도 1992년부터 노인의 날(10월 2일)에 그 해 100세를 맞는 노인들에게 대통령 명의의 청려장 지팡이를 내려준다. 대통령의 축수카드와 함께 오색찬란하게 장식된 청려장을 받은 집안에서는 안방, 거실 벽면에 고이 걸어놓으며 가보로 보존한다. 그만큼 청려장의 우아함은 전통 장수지팡이이자 민속품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청려장에 담긴 효심이 노인들의 건강한 삶 영위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으니 이 어찌 인생 마지막 효자발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지난해 가을철부터 왼쪽 골반부위가 욱신거리고 걸을 때도 뒤뚱거려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병원에서 CT촬영을 해보았다. 예상대로 육중한 몸을 82년째 무리하게 두 다리가 지탱해 온 결과라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담당의사의 말인즉슨 ‘노인이 마지막 기댈 수 있는 효자발은 지팡이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좋은 지팡이를 구해 의지하며 함께 사시라’는 충고다.
비록 대통령이 하사한 청려장은 아니지만 일찍 딸녀석이 마련해 준 가볍고 견고한 스테인레스 지팡이를 청려장으로 여기고 문밖에 나갈 때마다 이용하려 한다. 이젠 효자발이 있어 마음도 든든하고 발걸음도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든다.
/고재웅 전 군산·여수해운항만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