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

몇 년 전 일이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부여에서 개최하는 전국 행사에 주제발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여에 도착한 뒤 티타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 한 사람이 뽀로로’를 만든 최성일씨였다. 그는 부분 발제를 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 온 300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강연장 맨 앞줄에 앉은 진흥원장에게 물었다.

“원장님! 2×2가 얼마지요?”

“예, 4입니다.”

“최성일 선생님은 2×2가 얼마지요?”

“예, 저도 4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듣고자 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문화를 총괄적으로 지휘하는 한국문화 콘텐츠진흥원장이고, 뽀로로라는 히트상품을 만든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하면서 나는 김수영 시인이 쓴 <산문, 불온성不穩性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불온성이야말로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가 바로 이 불온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김수영 시인의 산문만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에도 그와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하나님, 자연 법칙이나 산술법칙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이유에서건 자연의 법칙들이나 둘 곱하기 둘은 넷이라는 산술법칙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2×2는 4라고 하는 이런 공식은 더이상 삶이 아니고. 차라리 이것은 죽음의 시작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예를 들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수학에서 2×2가 4만 되는 것이 아니고, 6도 되고 8도 되고, 아니면 백도 되고, 천도 될 수 있는데 꼭 4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요. 삶 그 자체가 무한한 가능성인데, 그 가능성을 한정 짓고 살아가는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새로운 문화 창조는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 그 무엇, 어쩌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그 ‘무엇’ 에 대해 ‘물음표, ’?‘ 즉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

내 말이 끝나자 최성일씨가 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2×2를 절대 4라고 말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다. 문화의 본질은 불온不穩한 것이라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해서 움직여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전북의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왜 그럴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여립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축옥사와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 당시는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지만, 현재는 불온성이 새로운 창의성이 되고, 창의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남이 뚫어 놓은 길을 따라서 가면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전라북도의 문화, 새로운 꿈을 꿔야 할 때다. 전라도를 벗어나 대한민국, 아니 세계 속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때가 바로 지금이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