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역할과 책임(R&R)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산하 25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은 1959년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시작으로, 1966년 국내 최초의 종합연구소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되었다. 그 후 연구분야의 전문화·특성화 필요성에 따라 많은 출연(연)들이 KIST로부터 분리되어 지난 50년간 우리나라 과학기술연구를 견인하며 국가발전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다른 시각도 있다. 지난해 7월 과학기술력을 앞세운 일본의 수출규제에 하릴없이 당한 것을 두고, 출연(연)의 역할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국민도 적지 않다. 그런 질책에 대해 과학기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다시는 외세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모든 출연(연)이 앞장서서 노력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쥐띠해인 2020년을 맞아 현재 출연(연)이 당면한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대략 일만 육천명에 달하는 출연(연) 소속 연구자가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제도는 단연 연구과제중심제도(PBS, project-based system)다: 연구자 인건비의 일부를 연구과제 수주를 통해 충당케 하는 PBS는 1996년 출연(연)의 정부 출연금 비중을 줄이고, 성과중심의 연구활동 활성화로 연구생산성을 높이려는 정부 방침으로 도입되었다.

이처럼 좋은 취지였지만, 출연(연)의 연구부서장이나 책임자들은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소속기관의 특성화 분야와 무관한 연구과제를 수주함으로써 기관별 특성화가 파괴되고, 소규모 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PBS 시행 이전에는 정부지원 대형 연구에 집중해왔던 출연(연)의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했고, 연구주체들끼리 소모적 수주경쟁을 벌이는 부작용까지 초래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과기정통부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출연(연)이 경쟁력을 강화하고 역량을 결집하여 국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장기적 관점의 역할과 책임(Role and Responsibility, 이하 R&R)을 자율적으로 정할 것을 주문하였고, 출연(연)들은 1년여에 걸친 진통 끝에 R&R 재정립을 완료한 상태다.

이 정책이 어떤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출연(연)의 연구 정상화·효율화의 선결과제라 할 수 있는 헝클어진 출연(연)의 연구 특화분야를 바로잡는 순기능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제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하 기초연)의 예를 들어보자. 30여년전 우리나라 1인당 GNI가 오천 불을 밑돌아, 연구기관마다 분석장비 부족으로 연구수행이 어려웠던 시절, 고가의 외산 분석장비를 한 곳에 모아 여러 연구기관의 분석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기초연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 연구환경이 크게 달라져, 대기업 연구소, 타 출연(연), 대학에도 고가의 장비가 넘쳐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부응하여 우리 기초연도 뼈를 깎는 수준의 내부 논의와 국내외 석학들의 자문을 통해 새로운 R&R을 마련하였다.

첫째, 방사광가속기 등 국가의 대형연구시설이나 장비의 구축 및 관리. 둘째, 대형 연구시설이나 장비의 활용도를 높이고 국산 분석장비 개발을 목표로 한 분석과학연구. 끝으로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분석기술의 공유 및 확산이 그것이다.

필자가 약 35년 전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해외과학자로 초청되어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출연(연)중 한 곳이었다. 그 후 31년간 고향에 있는 대학에서 사랑하는 아이들과 공부하다가, 다시 출연(연)에 돌아와 연구자로서 걷는 마지막 이 길이 우연이라기보다 운명처럼 느껴진다.

엄습하는 소명의식을 품고 정한 기초연의 새로운 R&R에 강호제현의 조언과 성원을 청한다.

/신형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