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솜씨

이재규 우석대 교수

한 마디 말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설화야 고금을 걸쳐 있었지만 요즘은 SNS를 통해 확산되는 속도와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주워 담기도 전에 말은 네트워크를 타고 천리를 가버린다. 복제되는 것 뿐만 아니라 댓글이 줄줄이 달려 곳곳에서 불이 붙는다. 몇 명이 쑥덕거리던 우물가 담화가 순식간에 수천 수만 개로 증식되는 것이다. 말의 통로가 무한대로 확대된 디지털사회에서 말은 더욱 중요해졌다. 매일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나는 정치인은 물론 언론인, 연예인, 작가 예술인 교수 등 발화자의 영향력이 높게 설정된 영역에서 말은 이들의 운명을 가르는 샷건이 된다. 멋진 말은 듣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지지와 연대 행동을 불러오지만, 저열한 말은 비난과 품평의 대상으로 지목된 상대보다 먼저 발화자를 시궁창에 던져 넣기도 한다.

“1인치 정도 되는 그 장벽(자막)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영화(cinema)라는 언어입니다.” 영화 <기생충> 으로 얼마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짧은 수상 소감은 자막이 있는 외국어영화에 배타적인 미국 관객들을 향한 위트이자 영화예술의 보편성을 잘 드러낸 멋진 말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그간 한국영화가 왜 한 번도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한 인터뷰에서도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매우 지역적이다(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라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오스카는 LA지역에서 상영된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영화제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미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으로 여겨온 미국인들의 관념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봉준호의 말이 품격 있는 언어가 넓혀주는 지평을 실감나게 하는 사례라면 지난 해 ‘조국 사태’ 이후 여러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보여준 말의 추락은 우리 사회의 수준에 대해 깊이 회의하게 만들었다. 논객을 자처했던 몇몇 이들은 예전의 자신을 스스로 뒤집으며 사람이 궁색한 처지에 몰리면 어떻게 훼절되어 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추락을 지켜보는 우리도 함께 오물을 뒤집어 쓴 듯 치욕스럽고 허탈했다. 말과 글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이 이전에는 고귀한 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구설을 자청하는 천업(賤業)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두부 자르듯이 한 번의 칼질로 선악 진영을 나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시비는 우리 안에도 뒤섞여 있다. 종교나 정치 영역처럼 적과 아군, 구원과 지옥행을 선명한 대비로 가르고 ‘이것만이 진리이니 믿고 따르자’는 통속적 솔루션은 짧은 순간 명쾌해보이지만 속으로 깊이 든 멍은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결국 끊임없이 또 다른 적을 호명하며 배제와 단죄의 소용돌이를 반복해 가게 된다.

어떤 사회적 성취나 지위를 내세워 대표성을 자처하며 대형 스피커를 독점해온 이들은 자기 주장 뒤로 늘 사람들을 줄 세우려 한다. 그들은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단지 말싸움의 잔기술과 선동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만 든다. 숙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미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가오는 봄에는 정치권력의 향방을 놓고 또 한 차례 말의 전쟁터가 벌어진다. 휘황한 깃발과 장담들이 기세를 올릴 것이다. 이번에는 숙련되고 멋진 말솜씨를 가진 진짜 싸움꾼들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말솜씨의 최고봉은 제 입을 닫아야 할 때를 아는 것. 진실은 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질 때 비로소 현실의 힘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사람을 뽑고 싶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