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백 리 마다 풍속이 달랐다.” 안자춘추에 실린 글이다. 오랜 옛날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서유기> 에도 그와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집을 떠나 3리만 가도 다른 풍속이 펼쳐진다.” 서유기>
같은 나라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랴,
만물이 오고, 만물이 가는 우주의 순환 속에서 오래 전 풍속과 현재를 비교해 보면
흐르는 세월 속에 사람들의 풍속과 문화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유추해볼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의 임진강가에 징파도라는 나루터가 있다. 그 나루터에서 일어난 일이 이수광(李?光)의『지봉유설芝峰類說)』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양반집 귀부인들이 난을 피하는 와중에 징파도에 이르러 배를 타려고 하였다. 그때 여종을 데리고 온 귀부인이 있었는데, 배에 빨리 오르지 못하자 뱃사공이 그 부인의 손을 잡아당겨 올리려고 하였다. 부인이 크게 통곡하면서 “내 손이 네 놈의 손에 욕을 당하였으니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고는 곧 물에 빠져 죽었다. 여종도 통곡하며 “내 상전이 이미 빠져 죽었으니 어떻게 차마 홀로 살겠는가?”하고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오늘날에 ’미투’라고 할까? 다른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것조차도 치욕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 당시 아낙네들의 전통적 사고방식이었다.
또 하나 진기한 이야기가 선조 때에 펼쳐졌다. 서울의 운종가에서 아내의 간통을 적발한 남편이 아내의 음부를 돌로 쳐서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성리학이 주가 되던 조선에서 여성의 음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설왕설래 끝에 경상도 함양에 기인으로 소문났던 오일섭이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물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때 오일섭이라는 사람이 알려준 말은 이러했다. “모나지 않은 돌로 차마 보지 못할 곳을 쳐서 죽었다(以無方之石他殺不忍見之處).”
그 뒤 조선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 음부를 표현해야 할 때는 꼭 쓰게 되는 ’법조문‘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이 중국보다 나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천한 여자도 절개를 지켜 개가(改嫁)를 하지 않는다.”
그 당시의 풍속에는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고, 아름다운 풍속으로 추앙받았다는 것을 실학자인 이익도 동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하루에도 1,200쌍이 결혼하고 400쌍이 이혼하며 급기야는 결혼한 사람들 중 수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기때문에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이혼율이 두 번째로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혼자 살겠다거나 결혼은 해도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불과 80년대 초만 해도 예비군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하면 5박 6일의 동원훈련을 빼주었는데 정부에선 인구 감소를 우려해 여러 가지 출산 정책을 입안하고 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거리마다 “재혼하세요”라 “동남아 여자와 결혼하세요.” 는 선전 문구가 범람하는 이 상황을 징파나루의 귀부인이나 이수광 또는 성호 이익이 저세상에서 볼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 속에 전통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풍속과 버려야 할 풍속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없는 그것이 문제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