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을 제주에서 살았다. 요즘 트랜드라는 ‘한 달 살이’를 해본 것이다. 매일 제주 곳곳의 숲과 오름, 바다를 발길 닿는 대로 가보았다. 시간이 많아지니 눈에 담는 장소도 늘어났지만 일주일 이내 짧게 머물렀던 이전의 여행에 비해 무엇보다 마음의 자세가 달랐다. 겨우 한 달에 ‘현지인’이 될 수는 없으나 주마간산으로 다닐 때 놓쳤던 것들을 보게 되고 그곳에 대해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풍광과 사람 모두가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국내 여행지 중에 제주는 한 달쯤 살아보는 데 최적의 장소다. 일단 섬이라는 특성상 일상에서 떠나왔다는 고립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고 동서남북 적당한 면적에 숲과 해변, 오름마다 개성이 있어 돌아볼 거리가 충분하다. 들어서는 순간 식생대와 바다 물색이 바뀌면서 이역(異域)에 왔다는 느낌을 제주만큼 주는 곳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제주만의 신화, 생존과 수난의 역사가 가세하며 뭍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주는 해안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올레코스 총 26구간, 425km를 개발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다. 오로지 올레 완주를 위해 한 달 살이를 계획하는 이들도 상당수라 들었다. 실제 걸어보니 곳곳의 표지와 안내 시스템(책자, 사이트, 스탬프, 안내센터, 자원봉사자)이 잘 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다. 디지털 지도 등의 기술 발전도 낯선 여행자에게 든든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 지자체에서 대중교통을 촘촘히 연결한 것도 평가할 대목이다.
먹고, 자고, 풍광을 즐기는 것. 여행지 품평에서 중요한 요소인 이 3박자를 골고루 갖춘 곳을 찾아서 사람들은 후기를 공유하며 여행정보의 빅데이터를 자율적으로 구축해간다. 정해진 패키지 구간을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행은 이제 올드한 것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장기 체류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여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어간다. 여행은 SNS 채널을 통해 개인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공유된다. 장소의 인증과 감정, 정보의 공유를 빼놓고서는 폰카를 들고 여행지를 ‘득템’하듯 표류하는 현대인의 여행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한 달 살이는 좋은 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여행 트랜드 너머의 것을 말해준다.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붙박이로 한 곳에 묶여 신분과 재산에 따라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살던 시대는 갔다. 그때의 여행은 일생에 한두 번 어렵게 나갔다 생존하여 돌아오는 귀향의 길이었다. 기본적으로 정주(定住)가 모형이었다. 이제 농경시대, 산업혁명을 거쳐 노마드의 세기가 왔다. 끔찍할 정도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한 사람의 생애 주기도 2막, 3막으로 길어졌다. 고용과 노동의 형태도 급속한 변화를 거치면서 우리가 기준점으로 삼는 성취, 생의 목표도 이전 세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로 나뉘어 반목 대립해온 이 지루한 낡은 전쟁도 가까운 몇 세대 안에 종식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언어와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고 가족의 전통적 형태, 애정의 결합 방식도 바뀔 것이다. 옛 시대 낡은 감정과 관념들은 언제 그런 시기가 있었냐는 듯 썰물처럼 퇴조해갈 것이다. 집단의 결속보다 주체적 개인이 더 소중해지고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전환의 시대. 제주 바다로 지는 단 한 번의 노을을 바라보며, 이번엔 또 어디로 건너뛸까 미래를 당겨 사는 사람처럼 다음 한 달 여행지를 궁리해봤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