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무성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무성서원은 이제 대한민국의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관심을 가지고 보존 관리해야 할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정읍 칠보에 자리한 무성서원은 1615년, 고운 최치원의 생사당과 태인 현감 신잠의 생사당을 함께 모시고 태산서원으로 시작하였다. 고운 최치원이 지금의 칠보인 태산 태수를 역임한 후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모신 때부터는 1100여 년의 역사이다. 조선 초, 불우헌 정극인이 상춘곡을 읊고 성리학적 질서의 고현동 향약을 실현한 때부터 계산해도 600여 년 가까이 된다.
무성서원은 1696년 조선 숙종 때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을 면한 전북의 유일한 서원이다. 1968년 사적 166호로 지정되었다. 오랜 기간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선비들의 귀감이 될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뜻을 추모하며 계승하려고 노력한 점, 마을 주민들과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룬 점 등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것이다.
논어 양화편에 공자는 제자 자유(子遊)가 무성 현감으로 부임하자,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격려차 방문했다. 무성 고을 입구에 이르자 백성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 무성 현감인 제자 자유에게 공자가 물었다. “어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려고 하느냐?” 자유가 답하기를 “예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도를 배우고 예·악(禮·樂)을 알면 곧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자, 공자가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논어 양화편의 공자지무성(孔子之武城) 문현가지성(聞弦歌之聲)에서 인용하여 서원 이름을 무성(武城)으로 하고, 입구 누각을 현가루(絃歌樓)라 하였다. 최치원의 치적을 자유(子遊)에 비견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릴 역량을 가지고 있는 큰 인물이 작은 태산 고을의 태수를 지내며 감동적인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일화를 전하는 공간은 도처에 있다. 하지만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배향하여 사액서원이 된 곳은 무성서원이 유일하다. 서원 강당을 보면 가운데 마루 3칸이 벽체가 없이 툭 틔어있어 내삼문의 태극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움의 담백함’이라는 아름다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반듯한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한겨울 눈보라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강당의 모습은 선비들의 중요한 덕목인 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 삼가야 한다) 그 자체인 것이다.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고 했다. 고운이 말한 풍류는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최고의 가치였다. 1100여 년간 고운 최치원의 풍류정신을 이어, 성리학적 유토피아를 구현해 온 곳이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이 이 시대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서원이 되기 위해서는 풍류와 선비정신을 구현하는 문화공간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무성서원이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거듭나 앞으로 또 천 년을 이어갈 서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일이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이흥재 무성서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