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대란’이라는 말이 연일 뉴스의 중심에서 오고간다.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코로나 시대’를 증거하는 한 풍경으로 오래 기억에 남게 될 것이다. 1월말 중국 우한이 전격 폐쇄되고 역병이 밀려드는 기세를 보도하는 뉴스가 급증하면서 대중의 공포는 자꾸 덩치를 키웠다. 자가 격리, 모임 자제, 공공장소 폐쇄 등이 권고되고 마스크 착용이 거의 의무처럼 통용되면서 마스크 수요는 공급을 단숨에 앞질렀다. 빠른 속도의 진단과 격리, 치료에서 보듯 감염병에 대한 우리 정부와 의료진의 대응 수준은 세계가 주목할 정도이지만 일부에서 마스크 공급의 혼선을 정략적으로 오도하고 공격하면서 코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마스크는 민심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로 커졌다.
마스크는 본질상 차단하고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내 코와 입을 가림으로써 외래의 것을 차단하고 본의 아니게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을 막는다. 마스크는 의료 현장이나 재난의 장소에서는 이렇게 안전의 도구이지만 사회적 의미에서는 신분의 노출을 막는 가림막으로 쓰여 왔다. 영화 <조로> 나 <베트맨> 에서 사회악을 물리치는 숨은 영웅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다. <브이 포 벤데타> 에서처럼 저항에 동의하는 익명의 군중들이 상징으로 내세우는 가면은 <조커> 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가진 어릿광대 악당으로 전변하기도 한다. 마스크는 얼굴이 드러났을 때 확인되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소거하고 무리 중의 하나로 개인을 위치시킨다. 위협이든 저항이든 어떤 의미에서이건 마스크는 그곳의 장소와 시간이 ‘비상’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비일상적인 표지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군중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이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래의 것이거나 방종한 이탈자,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으로 취급된다. 조커> 브이> 베트맨> 조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은 마스크를 벗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개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역병 소식이 돈 지 한두 달 만에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 일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존 버거의 소설 끝부분에는 많은 이들이 죽고 집이 파괴되는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야기가 나온다. 희망은 일시에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구원자에게서 오지 않는다. 작가는 매 순간, 매일의 삶이 의존하는 규칙성에서 희망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규칙성에는 박자가 있어요. 아주 희미하고, 들리지 않을 때가 많고, 심장박동과 비슷하죠. 그곳에 환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요. 그 박자가 외로움을 그치게 해주지도 않고, 고통을 치유해 주지도 않으며, 전화로 그 박자를 전해 줄 수도 없죠. 그건 다만 당신이 어떤 공통의 이야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죠.”우리의 삶이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그것은 일상의 소중함이다. 끼니 때가 되면 주섬주섬 밥을 챙겨 먹고, 친구와 술잔을 나누고, 무용한 농담을 하다가 누군가를 돌려 욕하고 응원하며, 눈 오는 풍경 하나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회복. 그것만이 종종 치욕을 안기는 이 삶을 지탱하게 한다. 다음 세대에게 이 불완전한 세계를 남겨주고서야 자연스럽게 종료될 내 소소한 일상이 이토록 그리운 것은 처음이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그동안 금지되었던 것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보복소비’가 찾아올 것이라고 한다.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바람과 햇빛, 풍경, 좋은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주는 다정한 목소리는 어떻게 보복해서 되찾을 수 있을까. 빼앗긴 시간을 두 배로 되찾을 순 없지만 소중한 것들을 비로소 깨달은 마음만큼은 오래 저장해두고 싶다.
/이재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