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경원동 웨딩거리 족으로 ‘세계바둑황제’ 이창호의 생가 이시계점이 있다. 여기서 그는 1975년 태어났고, 조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그의 바둑의 기초를 닦아준 사람은 전주의 아마추어 강자인 이정옥 5단이었는데, 수년간 이창호를 가르치며 1천판에 달하는 실전과 복기를 거듭한다. 10세(84년) 때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 90년도부터는 스승의 국수전 타이틀을 쟁취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타이틀을 석권하고 1992년 일본에서 열린 동양증권배 타이틀을 획득, 최연소 세계 타이틀 홀더가 된 이후 1994년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 히트 달성, 2003년 춘란배 우승으로 세계 타이틀 그랜드 슬램 달성 등 신화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스승 조훈현 또한 ‘원조 바둑황제’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1989년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에서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매머드급 세계대회로서 우승상금 40만 달러,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에 개최, 16강 초청에 일본 5, 중국 4, 대만 3, 호주 1, 미국 1, 한국 1장의 티켓으로 혈혈단신으로 분투, 우승으로 변방의 한국바둑을 세계 최강으로 올려놓은 사건이었다.
스승 조훈현이 있었기에 이창호가 있었다. 조훈현의 바둑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화려하다면, 이창호의 바둑은 느리고 치밀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중하고 진득했다. 입문 당시 스승은 이창호의 재주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창호에게는 ‘보이지 않는 천재성’이 있었다. 수를 잘보고 전투를 잘 하면서도 반집이라도 확실히 이기는 길을 가는 계산 바둑, 어린 나이에도 노회한 수를 두는 ‘어린 강태공’이 그것이었다.
이정옥의 인물평을 보면 이렇다.
“말이 없고 겸손했다. 온종일 바둑을 두어도 싫다고 하지 않았다.” “수를 신기할 정도로 빨리 봤으나 여간해서 수를 내지 않았다.” “흔히 창호를 노력형이라 부르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표현이다. 그의 심성이 천재의 빛을 감추고 있을 뿐 창호 같은 승부의 천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조훈현이 일세를 풍미하는 바둑 천재였다면, 이창호는 스승을 딛고 그보다 훨씬 큰 빛을 발했다. 스승이 낸 사활문제를 풀고 저녁에는 홀로 기보를 놓고 공부했다는 그. 조훈현의 부인이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2층에서 나는 돌 소리에 놀랐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천재도 갈고 닦아야 보물이 된다. 이창호처럼 겸손하고 재기를 감춘 큰 그릇은 더 그렇다. 드라마에서 소개된 상하이 대첩(2005, 농심 신라면배), 혼자 나가서 5명의 중국·일본의 강자들을 차례대로 거꾸러뜨려 우승을 차지했던 신화, 그 이창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