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재규 우석대 교수

그 여자의 목소리가 텅 빈 광장에 울려 퍼졌다. 새벽 4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입시다. 광주를 지킵시다.”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이 도시 전체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적막을 깨고 드르륵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탱크 캐터필러가 줄을 지어 가더니 연이어 폭음이 났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도청이 한 블록 바로 앞인 김정형외과 5층 창에 붙어 앉아, 나는 불을 끈 병실의 커튼 사이로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전남여고와 중앙초등학교 담벼락을 넘어 도망치는 시민군 뒤를 쫒듯 ‘투항하라, 투항하라’ 계엄군의 선무방송이 19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 시내를 뒤덮었다. 6월 초가 되어 깁스를 풀고 퇴원하던 날 금남로를 달리는 택시에서 도청 쪽을 힐긋 보았을 때 이제 여름인데도 내 몸을 덥치던 괴괴한 냉기를 잊을 수 없다. 그 새벽의 목소리가 자꾸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 나가게 된 학교는 더 휑했다. 총탄에 신체의 상당 부분이 날아간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친구 전영진의 책상에는 국화꽃이 담긴 화병이 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어린 시민군으로 도청을 사수하다가 체포된 김효석, 이덕준, 김향득 등의 빈 의자를 보았다. 주먹 좀 쓰던 뒷줄 친구들은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집권 군부의 명분에 희생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말씀이 좋았던 선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우리들은 다시 선생들의 매를 맞으며 쥐 죽은 듯이 학교를 다녔고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대학으로, 공장으로, 어둔 거리로 흩어졌다.

그로부터 40년.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세월을 네 번 거듭하는 동안 이 땅의 대통령은 여덟 번 바뀌었다. 그 시간 사이로 유행가가 해마다 바뀌고 스포츠와 드라마의 명장면들이 흘러갔다. 거리의 아우성과 이유를 달리 하며 죽은 시신과 지상에서는 더 의지할 데가 없어 고공으로 올라간 사람들의 얼굴이 콜라주처럼 뒤섞이며 이어졌다. 수많은 목소리와 선전 전단과 밀실의 술잔이 강물처럼 더해지는 동안 도시는 끝없이 아파트를 지었다 부수며 외곽으로 확장되었고 주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북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권’이 진공청소기처럼 먼지같은 사람들을 빨아들이며 욕망의 마천루를 쌓았다.

40년 세월을 뒤로 하고 우리는 어디만큼 걸어 나왔나. 이만하면 자리 잡아가는 거 아닐까. 한때의 시간을 저다마의 방식으로 보상받고 때로는 잊고 잊혀지며 그렇게 흐릿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전두환 그자의 “광주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피투성이 시간대로 돌아가고 만다. 광주를 겪은 우리 세대에게 그 피투성이 시신들, 그 거리와 새벽의 장면들은 미라처럼 굳어져 부석부석 회벽으로 부서질망정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문득 문득 도청이 나오는 꿈을 꾼다. 내 꿈에서 전두환은 여전히 푸른 군복을 입은 오십대의 장군이다. 다만 다른 것은 전세가 역전되어 시민군들이 시신으로 널브러졌던 그 광장에 전두환이 포승줄에 묶여 있다. 그 옆에 학살의 대가로 장관이 되고 몇 대에 물려줄 돈을 그러모은 자들이 굴비로 엮여 있다. 5월 27일 새벽에 차마 발사하지 못했던 시민군의 총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자들이 연이어 쓰러진다. 나는 환호하다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한낱 꿈에서 깨어나온다. 내게 오월은 꽃잎처럼 흩어져 내린 여린 목숨들의 몸에서 흘러내려 길바닥에 말라붙은 핏덩이이다. 그 피값을 제대로 돌려받기 전까지 우리의 오월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정태춘 노래 ‘5·18’)

/이재규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