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에서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한 뛰어난 판화작가의 유작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지용출로 예술계에서는 희귀하게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구매하고 유족이 기부한 일부 작품을 포함해 도합 67점의 작품이 선보였다. 지용출 작가는 1980-90년대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민중미술의 시대적 추세에 동참하며 판화를 통해 불의한 현실과 싸우는 사람들의 굵은 심줄과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변두리 민중의 깊은 주름을 칼끝으로 새겨 시대정신에 올곧게 부응했다.
이후 전북 지역에 정착하면서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고풍스럽게 남아 있는 전주 일대와 주변 지역의 스러져 가는 전통의 흔적과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버려진 아름다움을 그 음양의 판화에 담기 시작했다. 치열한 역사의 상흔을 다독이며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아로새길 만큼 그의 시선은 섬세해졌고, 일상의 현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널브러진 가녀린 생명들의 신음소리에 눈뜰 만큼 그의 영혼은 풍성해졌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판화 속에서 이 땅의 역사와 일상이 만났고 전통과 생명이 알차게 어우러졌다.
전시회 첫날 김용택 시인이 지용출 작가의 대표작인 ‘바람소리’에 감동받아 그 작품을 자택 대청 문 앞에 걸어둔 사연을 전하며 말했다. ‘나무는 정면도 없고 경계도 없다’고. 굳이 이 지역의 땅에 정착하여 겸손하게 농사를 배워 짓고 그 정직한 소출을 기대하며 한없이 기뻐한 그에게 꼭 맞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감이 그 시인의 말에 압축돼 있지 않나 싶었다. 그렇다. 그는 그 나무를 닮아 바람과 시원하게 만나고 싶었고 오염된 이 땅의 아픔을 감싸며 그 원초적인 생명의 신음소리와 그 너머로 싹터 오르는 희망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다.
살아생전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지인들과 SNS의 소개로 익명의 관객들이 호기심에 끌려 지난 한 달간 이 전시회를 찾아주었지만 코로나19 사태의 파동 때문인지 전시장은 자주 조용하고 한적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판화작가의 10주기 유작전이었고 애호가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한 작품 구매와 기부로 이루어진 선례가 드문 전시였지만 취재기자 한 사람 발걸음하지 않아 다소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이전에도 몇 차례 그의 전시회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작품들만이 그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현장이었다.
언젠가 짤츠부르크 답사 중 그 유명한 미라벨 정원 한 복판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에서 렘브란트의 풍성한 에칭화 전시회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동판에 선 하나를 파면서 가한 그 손가락의 힘과 순간적인 영감이 만들어낸 작지만 섬세한 그 이미지들의 기억이 아련하다. 지용출 작가는 주로 나무판에 파고 새기며 작업하면서 얼마나 긴장하고 또 얼마나 간절했을지... 그 모든 시들어가는 생명들의 이름을 불러내 온 몸의 안간힘으로 재현한 그 판화 위의 땀방울에 경의를 표한다. 이렇듯, 불후의 예술가는 생전에 불우했던 망각의 그늘에서 말이 없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힘으로 내내 소리 없이 담대하게 아우성친다.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