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白露) 지나자 풀잎에 이슬이 차다. 햇볕도 한풀 숨이 죽었다. 어느새 긴소매 차림이다. 나를 따라잡는 청년들, 종아리에 알통이 배어 있다. 스쳐 가는 자전거가 휙 바람을 일으킨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두어 자 더 깊어진 하늘에 딸려간 걸까, 잠자리도 높다. 유난히 길었던 장마, 좀체 가지 않을 성싶던 여름이 벌써 저만치 모퉁이를 돌고 있다. 멀리 돌아가기 싫어 콩 콩 징검다리를 건넌다. 잔잔한 줄만 알았던 냇물도 가까이 보니 잔물결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공사장에 기계 소리 요란하다.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큰일 난다는 듯이.
한여름 북적이던 다리 밑 걸상에 앉아 할머니 몇,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본다. 등판이 허전해 보이는 건 계절 탓일까? 내 마음 탓일까? 하늘의 구름도 어디론가 흘러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냇물뿐이랴, 구름뿐이랴. “그새 억새가 피었구나”, 어제 차창 밖으로 혼잣말을 던지던 친구의 말 흘려들었다. 귀 어두워 못 알아먹었다.